본문 바로가기

본문

[시가 있는 아침] 갈 때는 그냥 살짝 가면 돼

중앙일보 2018.05.18 01:20 종합 28면 지면보기
갈 때는 그냥 살짝 가면 돼  

-윤재철(1953~)  
 
시아침 5/18

시아침 5/18

갈 때는 그냥 살짝 가면 돼
술값은 쟤들이 낼 거야
옆 자리 앉은 친구가 귀에 대고 소곤거린다
그때 나는 무슨 계시처럼
죽음을 떠올리고 빙긋이 웃는다
그래 죽을 때도 그러자
화장실 가는 것처럼 슬그머니
(…)
왁자지껄한 잡담 속을 치기배처럼
한 건 하고 흔적 없이 사라지면 돼
아무렴 외로워지는 거야
외로워지는 연습
술집을 빠져나와
낯선 사람들로 가득한 거리 걸으며
마음이 비로소 환해진다
 
 
죽음은 남몰래 술자리를 뜨는 일과 같다. 술값 서로 내려고 카운터 앞에서 법석 떨지 않고, 소매치기처럼 소리소문없이 사라지는 것. 가면 다시 못 올 그 길의 아득한 외로움을 시인은 도리어 즐거워한다. 죽음 속에서 삶을 보았다는 듯 환한 얼굴로. 이 연습은 아주 그럴듯해서, 실습 같다. 
 
<이영광·시인·고려대 문예창작과 교수>
  

Innovation Lab

Branded Contents

트렌드뉴스

많이 본 뉴스
댓글 많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