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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트렌드]북키덜트가 나타났다 붙이고 오리니 시간 '순삭'

중앙일보 2018.04.17 00:02 2면 지면보기
다 큰 어른이라도 때론 모든 걸 내려놓고 어린아이처럼 펑펑 울고 싶은 순간이 있다. 숨막히는 경쟁 사회에 치이고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은 슬픔이 다가올 때다. 이럴 땐 순수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혼자만의 시간이 간절해진다. 잊고 있던 어린 시절의 행복을 찾는 동시에 조용히 사색할 수 있는 이색 책들이 베스트셀러로 올라선 이유다. 사람들은 책에 스티커를 붙이며 감정을 추스르고 종이 인형 책을 보며 잠시나마 치열한 현실을 잊는다. 책을 통해 동심을 찾는 ‘북키덜트’(Bookidult·책과 키덜트의 합성어) 모습이다.
조각 스티커를 하나씩 붙이며 작품을 완성할 수 있는 스티커 아트북이 인기를 끌고 있다/ 가위로 종이를 잘라 인형 놀이를 할 수 있는 책

조각 스티커를 하나씩 붙이며 작품을 완성할 수 있는 스티커 아트북이 인기를 끌고 있다/ 가위로 종이를 잘라 인형 놀이를 할 수 있는 책

 
# 공무원 하윤진(30)씨는 주말마다 종이접기 책을 펼친다. 절취선에 맞춰 평면도를 뜯은 후 정해진 순서대로 종이를 접어 토끼·얼룩말과 같은 동물 모양을 만든다. 하씨는 “종이접기를 할 때만큼은 오롯이 나에게 집중할 수 있다”며 “손재주가 없는 사람도 쉽게 따라 할 수 있을 정도고 완성 후 성취감도 크다”고 말했다.
 
 
# 직장인 김미영(35)씨는 최근 스티커 북에 푹 빠졌다. 김씨는 이 책을 가방에 넣고 다니며 점심시간에는 사무실에서, 퇴근 후에는 집 앞 카페에서 스티커를 붙인다. 그녀는 “각양각색의 스티커를 보면 학창 시절 다이어리를 꾸몄을 때와 선생님에게 칭찬받던 순간이 생각난다”며 “하나하나 스티커를 떼서 정성스럽게 붙이다 보면 마음이 차분해진다”고 만족감을 드러냈다.
 
실제 1970~80년대에 판매된 종이 인형.

실제 1970~80년대에 판매된 종이 인형.

 
실제 1970~80년대에 판매된 종이 인형.

실제 1970~80년대에 판매된 종이 인형.

서점가 취미 영역에 독특한 형태의 책이 잇따라 등장한다. 글과 사진이 가득하던 일반 책과는 구분된다. 3~4년 전에는 색연필로 색칠하는 컬러링 북과 좋은 글귀를 따라 쓰는 필사책이 인기를 끌었다. 올해는 책을 오리고 붙이며 접는 이색 책들이 어른의 발길을 잡는다.
 
가장 눈길을 끄는 형태는 ‘스티커 북’이다. 이 같은 종류의 책은 지난해 4월 첫째 주 인터넷 교보문고의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지만 올해 같은 기간 베스트셀러 100위 안에 5권이 있을 정도로 인기를 얻고 있다. 모두 성인용 도서로 어린이가 주로 갖고 노는 캐릭터 스티커 북이 아니다. 색이 칠해져 있지 않은 유명 명화나 자연, 동물 같은 그림 위에 색상이 있는 조각 스티커를 붙여 완성하는 형태다. 독자는 명화의 기본 설명을 읽고 한쪽에 준비된 스티커를 떼어 각자 정해진 숫자에 맞춰 옆면 하얀 종이에 붙이면 된다.
 
다수의 스티커 아트북을 내놓은 출판사 싸이프레스의 홍지은 콘텐트기획 팀장은 “스티커 북은 이미지를 도형으로 나눠 입체감 있게 표현하는 폴리곤 아트 기법을 활용했다”며 “컬러링 북과 달리 인쇄된 도면에 각각 색상이 정해져 있어 독자가 어떤 색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스티커 붙이기와 같은 단순 작업이 걱정과 고민이 많은 현대인에게 탈출구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박성희 한국트렌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위계질서가 강한 사회생활을 하는 중년은 매일 눈치를 본다”며 “남의 눈치 안 보고 내 맘대로 스티커를 떼고 붙이는 일에서 그들은 즐거움을 얻는다”고 말했다. 책을 펼 수 있는 작은 공간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홀로 즐길 수 있다는 점도 바쁜 현대인에게 매력적이다.
 
1970~90년대 문방구에서 팔던 종이 인형도 책 형태로 나왔다. 두꺼운 종이에 그려진 인형과 각종 의상을 가위로 오려 옛 추억을 떠올리며 종이 인형 놀이를 즐길 수 있다. 직장인 고유경(33)씨는 “어릴 적 기억을 되새겨 종이 인형 옷을 자른 후 얇은 어깨끈 부분에 투명 테이프를 덧붙여 더 단단하게 고정시킨다”며 “남들은 유치하다고 할지 모르지만 하루 종일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만지며 받은 디지털 스트레스가 풀리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종이 인형과 관련된 책으로는 동물 등을 입체적으로 접을 수 있는 3D 책도 있다. 이 책에는 평면 도면이 있어 도면을 책에서 뜯어내 순서대로 접기만 하면 다양한 형태의 동물 종이 인형을 만들 수 있다.
 
 
 
어른도 읽는 아이들 그림책
 
아이만 읽을 것 같은 그림책을 즐겨 읽는 성인도 있다. 커다란 그림이 그려져 있고 한쪽에 글이 작게 쓰여 있는 형식이다. 매일 밤 그림책을 읽는다는 직장인 이진주(35)씨는 “다섯 살배기 딸에게 책을 읽어주다가 오히려 내가 더 빠졌다”며 “그림책을 볼 때마다 각박한 현실 속에서 사악해졌던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직장인 박혜인(32)씨는 “그림책을 보면 정보가 넘쳐나는 복잡한 세상에서 벗어나 휴식하는 기분이 든다”고 전했다.
 
그림책을 통해 지친 마음을 힐링하고 이를 넘어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구매·소장하는 사람도 늘었다. 지난해 출간된 그림책 『어머니 여신의 천』은 인도에서 공수한 천으로 책에 나오는 직물을 재현해 비교적 비싼 가격(12만원)이지만 출판되자마자 완판됐다. 이 책을 출간한 보림출판사의 박은덕 편집부장은 “성인을 대상으로 내놓은 그림책이지만 가격이 비싸 판매 실적이 저조할 것으로 예상했다”며 “하지만 그림책의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4쇄를 찍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고 말했다.
 
그림책을 찾는 성인이 많아지면서 최근엔 성인 독자를 위한 그림책도 출시되고 있다. 아이에겐 자극적일 수 있지만 어른에겐 사색에 잠길 수 있는 내용으로 독자를 사로잡는다. 강제징용·위안부 등 역사적인 사건을 다룬 책부터 왕따·구제역 살처분 같은 문제를 담은 그림책까지 다양하다. 백은하 동화 작가는 “그림책은 떠올리면 가슴 아파 외면했던 문제나 사건도 특유의 따뜻한 시선으로 담아낸다”며 “어른이 편한 마음으로 현실 문제를 돌아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어린 시절을 생각나게 하는 이색 도서가 어른 독자에게 큰 공감을 얻는 이유는 무엇일까.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건강의학과 윤대현 교수는 “사람의 마음은 늙지 않는다”며 “어린 시절 좋아했던 놀이를 하고 그림책을 보면서 여전히 갖고 있는 ‘아이 같은 마음’의 욕구를 충족하며 휴식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단 자기만의 세상을 너무 오래 즐기는 것은 좋지 않다. 비현실을 현실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윤 교수는 “책을 읽으며 갖는 혼자만의 시간도 중요하지만 때론 다른 사람과 함께 속 이야기를 나누며 지친 마음에 휴식을 주는 것도 좋다”고 조언했다.
 
북키덜트를 자처한 어른들이 워커힐호텔앤리조트 내 더글라스하우스라이브러리에서 스티커북, 종이인형북으로 힐링하는 시간을 갖고 있다.

북키덜트를 자처한 어른들이 워커힐호텔앤리조트 내 더글라스하우스라이브러리에서 스티커북, 종이인형북으로 힐링하는 시간을 갖고 있다.

글=라예진·신윤애 기자 rayejin@joongang.co.kr, 사진=프리랜서 김동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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