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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트렌드]아재 개그 팀장님 시발상사<始發常事> … 일 떠넘긴 부장님 매일지랄<埋逸至剌>

중앙일보 2018.04.17 00:02 1면 지면보기
“희대병신(喜隊秉信)” “시발상사(始發常事)”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는가. 언뜻 들으면 욕 같지만 ‘무리에게 기쁨을 줘 신뢰를 얻다’ ‘모든 시작을 항상 일에 두다’라는 뜻을 품었다.
하지만 이 시대의 ‘상사’라면 한자 풀이만 보고 안심하기엔 이르다. ‘실적만으로 팀원을 판단하는 상사’와 ‘아재 개그로 팀원의 웃음을 강요하는 팀장님’이라는 뜻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풍자와 유머가 담긴 짧은 글인 ‘짤글’이 5년 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등장했지만 아직까지 그 인기는 식을 줄 모른다. 다만 예전엔 모두가 공감하는 글이었다면
요즘엔 새내기 직장인의 애환을 담는 짤글이 많다. 한 치의 손가락으로 사람을 웃기고 울리는 ‘촌지살인(寸指殺人)’ 짤글로 세상과 소통해보자.
 
SNS에서 선보인 짤글은 ‘SNS 시인’ 1세대로 통하는 하상욱(37)씨의 작품을 꼽을 수 있다. 그가 SNS에 올린 시 500여 편을 모아 펴낸 『서울 시』(2013, 사진1)는 시집으로는 드물게 지금까지 약 30만 권이 팔려 나갈 정도로 사랑을 받는다. ‘아빠’의 “안 아파 못 아파”, ‘흰머리’의 “세상 살다 보니 나도 물들었네”처럼 가족에 대한 사랑을 6~12자에 함축시켰다.
 
페이스북·인스타그램에서 ‘이환천의 문학살롱’ 페이지를 운영하는 방송작가 이환천(32)씨는 2세대 ‘SNS 시인’으로 통한다. 소셜미디어에 올려진 그의 시는 특히 ‘직장인’의 호응을 이끌어 낸다. “월급은 빚을 이길 수 없다”는 시 ‘빚’과 “일 더하기 일은 매우 힘듦”이라는 시 ‘일’에서 직장인의 애환을 그렸다. 이씨가 가장 좋아하는 댓글은 “ㅋㅋㅋㅋㅋㅋㅋㅋ”다. 이씨는 “‘ㅋ’의 수가 많을수록 목적을 달성한 것 같다”며 “회사일로 기분이 좋지 않았던 팔로어가 이곳에서 웃고 간다는 댓글을 볼 때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현재 그의 SNS 팔로어는 8만7000명(9일 기준)을 넘어섰다
 
 
 
사자성어 형식 빌려 풍자·해학 담아
 
요즘 3세대 SNS 짤글은 새내기 직장인이 주 타깃이다. 직장인이자 SNS 시인인 최진영(31)씨는 2년 반 동안 일한 첫 직장을 2015년에 그만두고 창업했다. 하지만 턱없이 부족한 자금 때문에 사업을 접고 지난 1월 직장인으로 ‘귀환’했다.
 
최씨가 느낀 새내기 직장인으로서의 애환은 지난달 출간된 『직장인 해우소』(중앙북스, 사진2)에 고스란히 담겼다. 이 책의 아이디어는 ‘시발점’이란 세 글자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그는 “시발점은 욕이 아닌데도 어감 때문에 쓰기 어려울 때가 있다”며 “우리말의 언어 유희와 한자의 뜻풀이를 잘 조합하면 재미있을 것 같았다”고 출간 이유를 설명했다.
 
그의 시는 직장 상사에 대한 불만을 사자성어 형식으로 압축시킨 점이 특징이다. 그 예로 “편안함에 묻혀 발랄함에 이르다”라는 뜻의 ‘매일지랄(埋逸至剌)’은 알고 보면 부하 직원에게 일을 다 맡겨 정작 본인은 안색이 좋은 상사를 비꼰다. “한 명 한 명에 대한 존중으로
 
1만 가지 이로움을 주다”라는 뜻의 ‘개존만이(個尊萬利)’는 사실 고생은 팀원이 다 하고 정작 다른 팀장들로부터 존중 받아 어깨를 으쓱이는 상사를 비유한다. 이처럼 신입사원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이 시대의 ‘팀장님’ ‘부장님’을 빗대는 짤글이 많다.
 
이 때문일까. 최씨의 인스타그램 팔로어는 현재 1만8000명을 넘어섰다. 새내기 직장인이 태그(tag)하고 댓글을 쓰는 소통의 장이 된 것이다. 그가 책 제목에 해우소(解憂所)를 넣은 이유다. 해우소는 절에서 화장실을 부르는 다른 표현으로 근심을 푸는 곳이라는 뜻이다. 최씨는 “공중화장실 벽에 누군가 낙서하면 또 다른 사람이 댓글을 달며 소통하듯 상사에게 치이는 직장인만의 해우소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이 책을 냈다”고 밝혔다.
 
이처럼 온라인·오프라인을 막론하고 짤글을 접할 기회가 늘면서 젊은 층이 시와 한층 가까워지는 계기가 됐다는 평가도 나온다. 하지만 우려 섞인 목소리도 있다. 신범순 서울대 국문과 교수는 “시를 읽는 사람의 정신·영혼이 긍정적으로 상승되고 읽는 사람이 시를 질적으로 좋게 즐길 수 있어야 비로소 존재 가치가 있다”며 “‘SNS 시’는 시의 형태만 빌려 쓴 짤막한 글일 뿐 정통 시로 인정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다시 말해 재미 삼아 읽는 SNS 시는 단순히 즐길 거리일 뿐이라는 것.
 
하지만 SNS 시를 비롯한 짤글 트렌드는 시대적 흐름이라는 의견도 있다. 대기업 브랜드 컨설턴트인 김왕기 WKMG 대표는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 전후에 “아빠 힘내세요” 같은 응원 문구가 인기를 끈 것을 예로 든다. 김 대표는 “핵가족(소인 가구) 시대를 지나 1인 가구가 급증하고,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자신을 돌아볼 시간이 부족한 젊은 세대는 단시간에 힐링하고 싶어 한다”며 “짧은 유머·응원 메시지에 대한 갈망이 유통업계의 제품 수요로 이어지는 배경”이라고 설명했다.  
 
짤글 마케팅 뛰어든 유통업계
 
최근 식품업계는 ‘짤글 마케팅’에 적극 뛰어들고 있다. 김왕기 WKMG 대표는 “음료·과자는 소비자가 마트에 들어가자마자 단번에 집어 드는 대표적 제품군”이라며 “패키지가 눈에 띄어야 구매로 이어진다”고 설명했다.
 
코카콜라는 지난달 ‘꽃’을 키워드로 한 콜라 한정판을 선보였다. ‘심쿵꽃남친’ ‘꽃길만 걷자’ ‘너에게 꽃힘’ ‘꽃보다 너’ ‘꽃가족 총출동’ 같은 재치 있고 희망적인 문구를 라벨에 새긴 음료수다. 김영은 한국코카콜라 브랜드 매니저는 “지난해 소비자를 대상으로 코카콜라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를 조사해 가장 많이 언급된 ‘맛있다’ ‘좋다’ ‘행복’ ‘사랑’을 토대로 문구를 만들었다”고 밝혔다.
 
제품 유형에 따라 위안을 주는 짧은 메시지가 라벨에 새겨지기도 한다. “청춘은 짧게 스쳐도 오래 기억나는 것.” 아이돌 그룹 워너원의 강다니엘이 청춘에 대해 정의 내린 한 줄이다. 이 문구는 광동제약이 ‘비타500’의 새 모델로 워너원을 영입하면서 지난달 17일부터 진행한 청춘 메시지 이벤트에 활용됐다.
 
광동제약이 2001년 출시한 ‘비타500’은 비타민C의 항산화 기능 노출에 주력해오다 2016년 카피라이터를 “대한민국 청춘하세요”로 바꿨다. 이 효과는 매출 상승으로 이어졌다. 출시 초 ‘비타500’의 연 매출은 약 800억원(출하가 기준)에서 지난해 1100억원으로 껑충 뛰어올랐다. 임승현 광동제약 F&B마케팅팀장은 “비타민C의 항산화 기능을 감성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단어로 ‘청춘’을 정했다”고 밝혔다.
 
한국인 특유의 쑥스러운 마음을 대신 읽어줄 수 있는 선물용 짤글 제품도 있다. 롯데제과의 껌·초콜릿이 대표적이다. 껌 포장지에 ‘고마워·사랑해·미안해’ 등 따뜻한 응원 문구를 내세우다 최근엔 아재 개그, 오늘의 운세, 힐링 문구 등 여덟 가지 테마로 소비자에게 다가간다. 또 초콜릿 ‘드림카카오’는 뚜껑 라벨에 ‘걱정 덜어드림’‘힘을 드림’같은 짤글을 넣으면서 판로를 넓히기도 했다. 롯데제과 김성민 홍보팀 과장은 “드림카카오는 짤글 마케팅으로 매출과 브랜드 인지도를 끌어올리는 데 1석2조의 효과를 얻었다”고 밝혔다.
 
 
정심교 기자 simky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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