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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웹소설] (7) 상실의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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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상실의 계절

중앙일보 2018.02.15 01:05
[일러스트 김회룡]

[일러스트 김회룡]

언덕 위에서 아니타와의 아름다운 추억을 떠올려 본다.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투자'라는 포럼에서였다. 그녀는 이지적 외모와 차분한 어조로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느끼고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있었다. 당시 내가 다닌 투자은행도 사회책임투자펀드에 관심이 있었기에 회사 대표로 그 포럼에 참석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사실 그 프로그램에 관심이 그다지 없었다. 다른 일로 좀 바빠서 지각했다.

 
“사회적 책임투자의 초기 역사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시초는 윤리적 규범에 기초한 투자의사 결정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혹시 술, 담배, 도박 등을 통해 이익을 얻는 기업들에 투자하고 계시는가요?”

 
당연히 있었겠지만, 대답이 없었다.

용어사전 > 사회책임투자(SRI, socially responsible investment)
금융사가 주식, 채권 등 금융자산에 투자할 때 무기, 아동, 노동착취, 환경오염 등 사회적으로 해로운 계약이나 기업에는 투자하지 않는 등 투자의 대상과 방식을 선별한 투자를 일컫는다. 윤리성이 높은 기업에만 투자하는 펀드가 중장기적으로는 일반적인 펀드보다 높은 수익률을 올리고 있다는 보고서도 속속발표되고 있다. 미국, 영국 등에서는 여러 종류의 SRI 지수가 존재하는데 미국의 DJSI(다우존스 지속가능성 지수)와 Domini Social 400(DS400) 지수, 영국의 FTSE 4Good Index등이 이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당장 그런 회사를 투자 대상에서 제외하십시오. 우리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제대로 인식해야 합니다. 1970년대 반전, 인권, 환경 운동 등이 사회적 이슈가 되었습니다. 당시 이와 연관된 기업들에 대해 투자를 하지 않거나, 적극적으로 주주권리 행사를 통해 기업의 변화를 끌어냈습니다.”

 
돈 벌면 다 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다. 소액 주주운동은 당시 내가 싫어하는 주제였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우리는 환경, 사회, 지배구조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의 노력이 세계적으로 공론화 되고 본격적으로 추진된 것은 2006년 국제연합(UN)의 책임투자원칙이 발표된 이후라고 하겠습니다. 이 원칙에는 모두 6개 원칙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규모가 큰 주요 연금과 기금들이 책임투자를 위한 가이드라인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프레젠테이션을 하면서 그녀는 늦은 나를 흘겨보는 듯했다. 그녀는 비영리 조직인 ‘소셜 인베스트먼트 포럼’ 소속으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얼마나 중요한지와 투자 포인트에 대해서 일장 연설을 계속하였다. 프레젠테이션이 끝나고 단상에 있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빌 제임스입니다.”

 
“네. 아니타 리입니다.”



명함을 교환한 후 말을 붙여 보았다.

 
“사회책임투자에 대해 컨설팅을 구하고 싶어요.”

 
그녀를 꼬실 흑심을 품고 만남을 유도했다.

 
“아. 네. 연락주세요.”

 
내 바람기가 발동했으나 만남을 거듭하면서 그녀에게 지금까지 만난 여자와 다른 진정성이 느껴졌다. 그녀를 어떤 식으로든 내 것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찼다. 사회적 책임을 이행하는 기업을 발굴하여 투자 대상에 포함할 것을 약속하였다. 주주인 투자자가 환경과 사회, 지배구조의 건전성을 고려하여 기업 감시를 할 권리는 천부인권과 같다는 말도 안 되는 과장도 늘어놓았다.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한 모든 이론과 선물 공세는 계속되었다. 심지어 ‘다우존스 지속가능경영지수’와 ‘FTSE4Good 지수’ 등에 투자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모습을 보이는 가짜증빙서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처음엔 나에게 회의적이었던 그녀는 일련의 내 행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무려 1년이란 시점이 흐른 뒤였다. 그녀는 나를 월가의 일반적인 남자들과 다르다고 생각한 것이다.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전에 사회적 책임 투자에 대해 이렇게 말하곤 했다.

 
“사실 사회적 책임 투자에는 허점도 많아. 투자방법에 대한 합의된 판단 기준도 그렇고 편입 종목에 대한 지속적인 관찰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애써 표현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눈 내리는 어느 날 우리는 첫 키스를 했다. 프렌치 키스였다. 입안으로 눈이 들어가는 기분이었는데 아랑곳하지 않았다. 혀와 혀가 감기는 기분이 짜릿했었다. 그 속에 눈이라는 이물질이 더 달콤하게 느껴졌다. 하긴 그에 앞서 그녀는 나를 여러 번 테스트했다. 그건 스무고개보다 힘든 과정이었다.

 
“빌. 투자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이 뭐라고 생각해?”

 
아니, 이 여자 제정신인가? 그건 돈 아니야? 속으로 그런 마음을 가졌는데 애써 태연한 척했다. 남자는 여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고상한 말솜씨를 보여야 하는 것은 기본이다.

 
“음. 일반적으로 돈이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착한 돈이라고 생각해. 더러운 돈을 번다고 한다면 내 마음이 불편하거든.”

 
속에 없는 말을 계속 이어갔다.

 
“얼마 전 화석연료를 엄청 배출하는 기업인이 찾아왔는데 문전박대했어. 글쎄. 투자의 원칙에 인류애를 거론하면 그렇지만 양심이 없는 기업에 투자하는 것은 지옥에나 갈 일이지. 착한 돈을 벌려면 나름의 원칙이 있어야 해.”

 
마음에 없는 말을 하려니 조금 더듬기도 하였다.



“일단 아니타처럼 원칙을 가져야 해. 그렇게 하려면 투자 대상 회사를 발견하고 주식을 사기 위한 충분히 숙성된 사고를 해야지. 그다음은 그 주식의 등락과 관계없이 장기적인 관점에서 인내하는 거야. 그 이후에 따라오는 결과는 뭐 행운이라고 생각해. 세상에서 운으로 이루어지는 부분은 어쩔 수 없거든.”

 
그녀는 나를 빤히 바라보면서 내 눈동자를 유심히 관찰했다.

 
“그대의 눈동자는 그대의 진실을 말하는 건가. 그대의 말은 그대의 진정한 투자 철학인가. 내가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그대는 믿을 만한 존재인가.”

 
나는 애써 태연한 척 말했다.

 
“나의 모든 것은 아니타의 판단에 달려 있겠지. 삶이 나를 속일지라도 나는 아니타의 사람 보는 안목을 믿어. 진실은 때로는 오해를 사기도 하지만 정직한 기업처럼 언젠가는 제대로 평가를 받지 않을까?”

 
레스토랑에서 포도주를 얼마나 비웠나. 나는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그리고 손을 꼭 잡았다. 손이 차가웠다. 내 입술에 그녀의 손을 가져다 입김을 넣어주었다. 그녀는 내 품에 안겼고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녀의 입술에 내 입술을 포개었고 내 혀와 그녀의 혀는 서로 엉겨 붙어 떨어지지 않을 듯했다. 그녀의 집에 들어가고 싶었으나 작전상 후퇴했다.

 
“아니타. 사실 처음부터 널 만난 건 내 운명이라 생각했어. 너를 생각하며 힘들어도 하루하루를 보냈어. 이제 너는 나를 지탱하는 힘이야. 내 진심을 믿어줘. 이만 갈게. 좋은 꿈 꿔.”

 
그로부터 한 달 뒤 나는 그녀와 뜨거운 밤을 보냈다. 거칠게 그녀의 옷을 하나하나 벗기는데 아니타가 오히려 서둘렀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그녀의 잘빠진 몸매는 나를 흥분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서둘지 마. 천천히 애무해줘.”

 
내 입술을 그녀의 발끝으로 가져가서 간질였다. 그리고 조금씩 조금씩 위로 올라갔다. 배꼽에서 원을 그리며 오랫동안 그 언저리에 머물렀다. 그녀는 내 머리를 붙잡고 있었고 나를 조금 밑으로 내렸다. 나는 부드럽게 그녀에게 최선을 다한 후 키스를 했다. 그녀를 옆으로 누이고 목덜미를 안는데 그녀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내 몸 위에 올라탄 그녀의 가슴을 만지면서 아랫도리를 흔들어 댔다. 그녀는 파도처럼 출렁였고 내 아래는 힘찬 요동을 쳤다. 그날 밤 아니타의 몸 구석구석을 안단테로, 알레그로로, 비바체로 탐닉했다. 그 분야에서는 이미 노련한 나였지만 서툰 척했다. 이후 그녀에게 정성을 다한다는 느낌을 주면서 우리는 주기적으로 사랑을 나누었다. 언덕 위 차 안에서 그런 생각을 하며 잠이 들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어둠이 짙게 깔린 집에 도착했을 때 어머니는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그 처녀 참 참하더라. 왜 헤어지려고 하니. 너의 선택이지만 내가 사람 보는 눈은 있는데 교양도 있고. 음 일단 상당히 순수해 보였어.”

 
“네. 맞아요.”

 
“네 전화번호가 바뀌어 연락이 닿지 않았고 결국 수소문을 하여 집을 찾아왔다고 하더구나.”

 
“그래서요.”

 
“탁자에 앉아 편지를 쓰고 내게 그걸 주었는데 여기 있다. 네 말대로 머리를 식힐 겸 세상 구경을 떠났고 언제가 연락을 줄 것이라고 했다.”

 
“네.”

 
“전화는 없다고 했어. 네가 시키는 대로 다 한 건데. 나는 네가 그녀를 피하는 게 이해는 가지 않는다.”

 
나는 어머니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뒷동산에 있는 성당에 가서 아무도 없는 곳에 앉아 속죄하였다. 성당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었다. 입구에 한 줄의 글을 쓴 사람들의 기록이 있었다. 누구는 감사의 글을 누구는 은총을 구하는 글을 누구는 용서의 글을 썼다. 나는 이렇게 한 줄을 썼다.

 
“그동안의 방탕함과 그 동안의 속임수를 당신이 흘린 피로 깨끗이 씻어 주소서.”

 
아무도 없는 성당에서 나는 통곡을 하였다. 살아온 시간에서 내게 진실의 문이 있었는가에 대해 '노'라 대답했다. 목청껏 울부짖었다.

 
“앞으로 어떤 고난이 있더라도 진실로 향하는 문을 향해 나아가겠습니다. 도와주세요.”

 
피가 터지듯 외쳤다. 내 다짐은 울림으로 내 귀에 다시 돌아왔다.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의 과제를 진실로 받아들이기로 신과 약속했다. 의자에 앉아 아니타가 쓴 편지를 읽는 내 눈에서 하염없는 눈물이 흘렀다. 그건 사랑의 증표였고 내 눈물은 인간으로서 참회의 의미였다.

 
'사랑하는 빌. 네가 홀연히 이유 없이 떠난 후 내 하루는 허공 속에 묻힌 의미 없는 시간이었어. 영문을 모르겠지만, 사람은 늘 실수를 하는 거야. 넌 내게 진정한 삶의 가치를 보여준 사랑의 화신이야. 그 어떤 고난과 시련이 오더라도 네가 잘 해결하리라 믿어. 완벽한 투자가 없듯이 완벽한 인간은 없어. 하지만 넌 내게 완벽에 가까운 남자였어. 사랑이란 위대한 힘은 완벽하지 않은 것도 완벽하게 보이게 하는 마법을 가진 묘약과 같아. 내가 뭔가 오해할 일을 했다면 용서를 구할게. 그리고 네가 준 돈은 일단은 가지고 있을게. 좋은 일에 우리 사용하자. 세상은 거짓과 교만이 넘치지만, 우리가 세상을 바꿀 수 없을 것이라고 포기하는 생각은 하지 말자. 너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는 않아. 언제나 활기찬 네 모습과 특유의 향기는 내 삶의 윤활유였어. 남자를 넘어 너는 내 신뢰의 상징이었어. 네 뺨에 키스하며 그렇게 말해 주고 싶어. 너는 나의 자랑스러운 믿음의 화신이었다고. 넌 좋은 남자였고 나는 너를 그렇게 기억할 거야. 너를 기다릴게. -아니타.'

 
사랑은 자기에게 성내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나는 나 스스로 화가 났다.

 
“아니타에 대한 미련보다는 그녀에 대한 죗값을 달게 받겠습니다. 이곳에서 그 어떤 박해도 달게 받겠습니다.”

 
나는 혼자서 그렇게 외쳤다. 내 목소리는 성당 안을 가득 채웠고 내 귓전에 누군가의 메시지가 들린다.

 
“신뢰를 구하라. 형제여. 그 어떤 고난과 시련에도 굴하지 않고 너의 길을 가라. 슬픈 날을 참고 견디면 즐거운 날이 올지어다. 현재의 우울함은 새로운 희망을 쓰기 위한 준비이니. 형제여 좌절하지 말라.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사라지지만, 그것이 기쁨이든 슬픔이든 지나고 나면 다 그리움이 된다. 훗날 돌이켜 보면 모두 가치와 의미를 발견하리라.”

 
아니타는 내게 삶이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었다. 한참을 무릎 꿇고 참회를 했다. 내 인생에서 그렇게 많은 눈물을 흘린 적은 없었다. 나는 백지를 꺼내 아니타에게 부치지 못한 편지를 썼다.

 
'아니타. 이 세상에 완벽한 게 없다는 네 말에 공감해. 하지만 나는 너와의 완전한 사랑을 꿈꾸었어. 헤어지고 고통 받는 것. 그게 내가 살아온 젊은 날의 속죄 길이라고 생각해. 훗날 내가 네 앞에 떳떳한 남자로 서길 바라며 네가 남의 여자가 되어도 너를 내 가슴 속에 영원히 간직할 거야. -빌.'

 
성당을 나와 밤길을 걷는데 하늘에 별이 반짝인다. 이 세상 사람들 한명 한명에게 그 별빛이 따스하게 비치길 바랐다. 그렇게 길을 내려갔다. 내 길, 혼자만의 길, 그 속에서 과연 나는 내가 꿈꾸는 유토피아를 만들 수 있을까. 하늘의 별은 총총했고 내가 올린 논문에 대한 반응이 무척 궁금해졌다. 그래서 종종걸음으로 집으로 갔다. 논문에 대한 반응이 뜨겁지는 않았다. 하지만 하루하루에 의미를 두지 않기로 했다. 꿈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 믿었다. 아니타의 편지가 내게 큰 힘이 되었다. 아름답고 슬픈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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