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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복 대기자의 퍼스펙티브] 예측불허 한반도 정세 … 문재인 정부, 호랑이 등 올라탔다

중앙일보 2018.02.15 00:02 종합 23면 지면보기
포스트 평창올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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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기를 앞세운 남북한 선수단이 맨 마지막 순서로 평창 올림픽 스타디움에 모습을 드러내자 토마스 바흐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VIP석에 앉아 있던 문재인 대통령 내외와 북한에서 온 김영남 최고인민위원회 상임위원장, 김여정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도 일어나 관중과 함께 힘찬 박수를 보냈다. 92개국에서 온 2920명의 선수가 참가한 역대 최대 규모 동계올림픽은 지난 9일 그렇게 막이 올랐다.
 
IOC 입장에서 평창올림픽은 불확실성과의 싸움이었다. 바흐 위원장이 제일 신경 쓴 것은 북한 변수였다. 평창올림픽의 성공적 개최와 흥행을 위해서는 한반도 정세의 안정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열쇠는 북한이 쥐고 있었다. 북한이 참가하면 최선이지만 애초부터 그건 기대하기 어려웠다. 1988년 서울올림픽 때도 북한은 참가하지 않았다. 북한이 불참하더라도 대회 기간에는 북한이 한반도 정세를 악화시키지 않을 거란 확실한 전망이 필요했지만, 상황은 정반대로 흘러갔다.
 

난해 북한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 장거리 미사일을 포함해 모두 16차례의 미사일 시험 발사를 강행했다. 수소폭탄을 이용한 6차 핵실험도 했다. 그때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화염과 분노’, ‘완전한 파괴’ 같은 섬뜩한 말 폭탄을 쏟아냈다. 한반도의 긴장이 위험수위로 치달으면서 선수단의 안전이 확보되지 않으면 평창올림픽 참가가 어렵다는 얘기가 IOC 회원국들 사이에 나오기 시작했다. 지난해 11월 말, 북한이 미국 전역을 타격할 수 있는 화성-15형 미사일 시험 발사에 성공하자 니키 헤일리 유엔 주재 미 대사 입에서는 “미국 선수단의 평창올림픽 참가는 ‘결정되지 않은 문제(open question)’”라는 ‘폭탄’ 발언까지 나왔다. 누구도 평창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장담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북한이 화성-15형 미사일을 발사한 다음 날 문 대통령은 트럼프와 통화하면서 평창올림픽 개막에 맞춰 미국이 고위급 대표단을 파견한다는 공식발표를 해 달라고 요청했다. 평창올림픽을 둘러싼 불확실성 해소에 도움이 되는 건 물론이고 미국이 평창올림픽을 진지하게 여기고 있다는 메시지를 북한에 줄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문 대통령은 한·미 연합훈련을 올림픽 이후로 연기하자는 승부수도 던졌다. 적어도 올림픽 기간에는 핵이나 미사일 도발을 자제할 수 있는 명분을 북한에 제공하자는 취지였지만 사실은 평창 이후까지 내다본 포석이었다. 트럼프가 두 제안을 수용하면서 평창에 서광이 비치기 시작했다.
 

정적 반전은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신년사에서 나왔다. 그는 “남조선에서 열리는 겨울철 올림픽 경기대회가 성과적으로 개최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면서 “대표단 파견을 포함해 필요한 조치를 취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그로부터 9일 만에 남북 고위급 회담이 판문점에서 열리면서 북한의 평창올림픽 참가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북한은 선수단은 물론이고, 응원단과 예술단, 태권도 시범단 등 무려 500여 명을 평창에 보내기로 했다. 바흐 위원장의 적극적인 중재로 남북한 선수단 공동입장과 올림픽 사상 최초의 남북한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 구성도 성사됐다. 평창올림픽의 성공적 개막에 누구보다 감격한 사람은 바흐 위원장이었을 것이다.
 
김정은은 고위급 대표단의 일원으로 여동생인 김여정을 특사로 보내는 파격까지 선보였다. 김여정은 문 대통령에게 김정은의 친서와 함께 방북 초청과 남북 정상회담을 제안하는 구두 메시지를 전달했다. 정부는 국빈급 이상의 예우로 북한 고위급 대표단을 환대했고, 귀환보고를 받은 김정은은 남측에 사의를 표하며 “북남 간 대화와 화해 분위기를 승화시키라”고 지시했다. 평창올림픽을 남북 관계 개선과 한반도 평화의 전기로 삼는다는 문재인 정부의 구상이 김정은의 ‘광폭(廣幅)’ 행보와 맞아떨어지면서 남북 관계는 급물살을 타고 있다. 불과 두 달 사이에 분위기가 180도 바뀌면서 3차 남북 정상회담까지 시야에 들어왔다.
 
평창올림픽 기간 중 한·미 연합훈련의 연기와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 자제로 일시적 ‘쌍중단’ 효과가 나타나면서 평창올림픽 성공은 ‘기정사실(fait accompli)’이 됐다. 문제는 평창올림픽 이후의 한반도 정세다. 내달 중순 평창 동계패럴림픽 종료와 함께 한·미 연합훈련이 재개되고, 이를 빌미로 북한이 핵과 미사일 도발에 나선다면 한반도 정세는 다시 평창 이전으로 돌아간다는 게 얼마 전까지의 지배적 관측이었다. 북한에 대한 제한적 수준의 ‘예방 타격(preventive strike)’을 의미하는 ‘코피(bloody nose) 작전’을 트럼프가 실행에 옮길 경우 평창올림픽 이후 몇 달만에 한반도의 무력 충돌이 현실화할 수 있다는 암울한 전망까지 나왔었다. 하지만 남북 관계가 돌발변수로 등장하면서 한반도 정세는 예측불허의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창 이후의 한반도 정세를 낙관하긴 이르다. 류길재 전 통일부 장관은 “비핵화 문제를 둘러싸고 미국과 북한이 대립하는 구조적 틀에서 달라진 게 없다”면서 “평창올림픽이 끝나면 다시 이전 상태로 회귀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하지만 일부 긍정적인 신호들도 감지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조건 없는 대화를 수용하는 쪽으로 대북 접근법을 수정했다는 미 언론 보도가 잇따르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지난 12일 미 행정부 고위 관계자를 인용해 “트럼프 행정부가 최근 몇주 간의 내부 검토 끝에 북한에 대한 전술적 접근법을 한국과 연대하고, 북한에 예비 대화를 할 준비가 됐다는 신호를 보내는 쪽으로 전환했다”고 보도했다.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평창올림픽 개회식에 참석하고 귀국하는 전용기 안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마이크 펜스 미 부통령은 “북한이 비핵화를 향한 분명한 조처를 하기 전까지 압박을 계속하되 북한과의 ‘대화를 위한 대화’도 수용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한국은 남북관계 개선 전망에도 불구하고 대북 압박을 계속하고, 미국은 북한과 탐색적 수준의 대화를 시작한다는 게 한·미 최고위급 차원에서 합의된 접근법이라는 것이다.
 
김연철(인제대) 교수는 평창 이후의 한반도 정세에 대해 “평창올림픽으로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는 효과를 거뒀다”면서 “최악의 상황은 피한 것 같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하지만 “핵 문제 해결까지는 갈 길이 멀기 때문에 낙관할 상황은 아니다”는 신중론을 폈다. 남·북 관계와 한·미 관계를 통해 북·미 관계와 핵 문제를 푸는 것이 중요하지만, 결코 쉽지 않은 과제란 것이다.
 

요한 것은 한국에 ‘올리브 가지(olive branch)’를 내민 김정은의 의도다. 미국의 군사적 압박과 국제사회의 경제제재로 조성된 위기 국면을 돌파하기 위한 위장 평화 공세라는 말도 있지만 핵 무력 완성에 따른 자신감을 바탕으로 남북관계를 풀어보겠다는 진정성이 엿보인다는 지적도 있다. 대북 압박 공조의 약한 고리인 한국을 흔들어 한·미 동맹을 이간하고, 대북 제재를 이완하기 위한 술수라는 분석도 있다.
 
김현욱(국립외교원) 교수는 “북한의 평창올림픽 참가를 계기로 한국은 일부 대북제재에 예외를 인정하기 시작했다”면서 “김정은은 남북 관계 개선을 통해 무엇보다 제재 완화를 기대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연철 교수는 “북한의 핵무장에 따라 격화된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을 상쇄하는 목적이 큰 것으로 보인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류 전 장관은 김정은이 물밑에서 주고받는 줄다리기 과정 없이 문 대통령에게 바로 남북 정상회담을 제안한 점에 주목하면서 “아버지인 김정일과 달리 ‘정공법’을 구사하는 김정은의 스타일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평창 이후 한반도 정세를 좌우할 발등의 불은 한·미 연합훈련 재개다. 김현욱 교수는 “이미 미 태평양사령부가 자체적 필요에 의해 훈련 규모를 축소하기로 한 거로 안다”면서 “축소 조정하는 선에서 별문제 없이 넘어갈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한·미 연합훈련 재개를 이유로 북한이 핵·미사일 도발을 재개하진 않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김연철 교수도 “김정은이 지난해 말 핵무장 완성을 선언한 것은 정치적 선언이지 기술적 완성 선언은 아니다”면서 “현 수준에서 일단 핵 동결 상태를 유지한다는 게 김정은의 전략적 판단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남북 대화 국면이 지속되는 동안에는 핵과 미사일 도발을 자제할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정은의 속내를 알기 어려운 만큼 그가 내민 손을 덥석 잡기는 어렵다. 판단이 어려울수록 원칙을 지키는 게 중요하다. 첫 번째 원칙은 북한이 핵과 미사일 시험을 재개하는 순간 정상회담은 물 건너간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최소한 정상회담 때까지는 도발 중단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두 번째는 정상회담에서 북한 핵 문제를 논의한다는 원칙이다. 그게 전제되지 않으면 미국은 물론이고 국내 여론도 설득할 수 없다. 세 번째는 북·미 대화다. 미국이 대화를 제안하면 조건 없이 나서라는 것이다.
 
김정은의 대화 공세로 문재인 정부는 호랑이 등에 올라탔다. 중간에 굴러떨어지지 않으려면 균형을 잘 잡아야 한다.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중심을 잘 유지해야 한다. 그래야 무사히 목적지까지 갈 수 있다. 문재인 정부의 진짜 실력이 시험대에 올랐다. 
 
배명복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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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복 배명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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