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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의 평양 오디세이] 고독한 군주의 모노드라마 … 김정은의 TV연설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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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 중앙일보 통일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lee.youngjong@joongang.co.kr

고독한 군주의 모노드라마 … 김정은의 TV연설 정치

중앙일보 2018.01.03 01:00
북한의 컬러TV 방송은 한국보다 6년 이른 1974년 시작됐다. 주민 통제와 김일성 일가 우상화, 선전·선동에 텔레비전이 유용하다는 걸 일찌감치 간파한 결과다. 국제사회가 인터넷과 유튜브 영상, 모바일 등으로 옮겨가고 있지만 여전히 북한의 중심 미디어는 TV다. 매년 1월 1일 2500만 북한 주민을 TV 앞에 모여앉게 하는 시청률 1위 프로그램이 있다. 김정은 신년사 방송이다. 노동당 70년 통치를 거치며 축적된 선전·선동 노하우의 결정체인 김정은 TV 연설 속으로 들어가 본다.
 
모노드라마였다. TV 카메라 앵글 속으로 등장한 그는 홀로 대 여섯 걸음 옮겨 연단에 섰다. 가지런히 놓인 7개의 마이크가 사열하듯 주인공을 맞이했다. 붉은색 노동당 깃발이 서 있고, 연단과 뒷배경엔 노동당 상징 마크인 ‘붓과 마치·낫’ 3종 세트가 새겨졌다. 화면에 잠깐 비친 눈 덮인 건물 사진은 이곳이 평양 중구역 창광동의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청사임을 드러낸다. 노동당 위원장 김정은의 집무실이다. 그의 2018년 신년사 TV 연설 방송은 이렇게 시작됐다.

 
관영 조선중앙TV로 중계된 김정은 신년사 방송은 평양 시간으로 1일 오전 9시(북한은 서울보다 30분 늦은 ‘평양시’를 채택)부터 30분간 이뤄졌다. 모두 1만3000자 분량으로 A4 용지 10쪽에 해당한다. 여기에는 ‘국가 핵무력 완성’이란 김정은의 주장과 미국 본토를 타격할 핵 버튼이 자신의 책상 위에 놓여있다는 겁박, 평창 겨울올림픽에 대표단을 파견하겠으니 ‘북남 관계’를 정상화하자는 대남 유화 공세가 담겼다. 대북제재로 ‘유례없는 엄혹한 도전’이 닥쳤다는 절박감과 ‘불순 적대분자’를 색출하라는 주문도 포함됐다. 일종의 시정연설인 셈이다.
 
연설 내내 김정은 외에 화면에 등장한 인물은 없었다. 노동당과 내각·군부의 핵심은 물론 오빠를 곁에서 챙기던 여동생 김여정도 마찬가지다. 연단 아래쪽에 상당수의 청중이 있는 것처럼 분위기가 연출돼 있지만 허구였다. TV 연설 녹화를 담당한 선전선동부의 카메라와 극소수 기획·연출자만이 자리한 듯했다.
 
김정은의 2018년 신년사 연설은

김정은의 2018년 신년사 연설은

그 공백을 메운 건 뜻밖에도 엄청난 박수갈채였다. 연설 마디마디 35차례나 박수가 쏟아졌다. 1분에 한 번꼴이 넘는다. 방청객이 없는데 박수는 우렁찬 까닭은 편집의 기술이다. 북한은 김정은의 연설 곳곳에 미리 녹음한 박수소리를 끼워 넣었다. 우리 TV 예능프로가 걸음마 시절에 써먹은 방식이다. 단박에 알아챌 수 있는 저급한 기술을 최고지도자의 신년 연설 방송에 써먹는 배경이 궁금해진다.
 
무엇보다 눈길을 끈 건 시청자와의 아이컨텍(eye contact)이 전무하다는 점이다. 방송 카메라는 김정은의 정면이 아닌 약간 측면 쪽에 자리했다. 그러다 보니 연단이 기울어진 모습으로 보였다. 한국이나 서방국가의 대통령 연설 방송에선 피하는 앵글이다. 김정은의 시선은 연설문구가 적혀있는 2~3개의 전면 프롬프터를 부지런히 오갔다. 카메라와의 눈맞춤은 애써 피하는 듯했다. 경제문제를 얘기할 때 특히 그랬다. “국가경제발전 5개년 전략(2016~2010년) 수행에서 커다란 전진을 이룩했다”고 언급했으나 현실과 큰 차이가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김정은은 지난해 ‘만리마운동 선구자 대회’를 치르겠다고 공언했다. 1950년대 후반 시작된 천리마운동을 더 강화한 노동력 동원 캠페인이다. 하지만 구렁이 담 넘어 가듯 하며 대회는 무산됐다. 최고지도자의 지시가 먹히지 않을 만큼 상황이 심각하다는 방증이다.
 
이런 난국 속에서도 김정은은 올 신년 연설을 통해 홀로서기를 시도했다. 연설문 어디에도 ‘김일성’과 ‘김정일’ 이름을 찾아볼 수 없다. 그의 은회색 양복 깃에 김일성·김정일 배지(북한은 ‘초상 휘장’이라고 표현)가 사라진 것도 이런 맥락으로 풀이된다. 의도적 흔적 지우기를 통해 독자 통치시대의 개막을 알리려 한 것이다. 하지만 녹록지 않아 보인다. 대북제재가 절정을 치달은 지난해 김정은은 극도의 고립과 자폐를 겪었다. 집권 초 고모부 장성택을 필두로 측근 그룹은 숙청 피바람 속에 몰락해 갔다. ‘믿을 건 핏줄뿐’이란 생각에 최근엔 29세 여동생 김여정을 권력의 핵심에 앉혔다. 3대 세습에 이어 ‘남매 정치’란 신조어까지 낳았다. 지난달 김정일 사망 6주기 때는 혼자 참배하는 김정은 사진이 노동신문에 실렸다. 고독한 군주의 일인극 모양새다.
 
모노드라마는 말 그대로 주인공 혼자서 극의 전반을 이끌어가야 한다. 무엇보다 그의 연기력이 빛을 발해야 성공할 수 있다. ‘빨간 피터의 고백’(1977년 작)의 추송웅처럼 말이다. 김정은 위원장의 모노드라마는 아직 어설프다. 신년 연설은 청중의 공감을 얻지 못했다. 집무실 책상에 ‘핵 단추’가 있다는 식의 주장은 치졸한 느낌마저 준다. 역사상 어느 최고지도자도 핵무기를 드러내 과시하며 ‘핵 불바다’ 위협을 가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나라나 지역도 핵으로 위협 않을 것”이란 연설은 그동안의 도발적이고 위협적인 언동과 충돌한다. 불과 몇 달 전 “남조선 것들 쓸어버리라”며 극언을 퍼붓던 김정은이 “상대를 자극하는 행위는 종식돼야 한다”며 아닌보살 하는 건 볼썽사납다. 진정성 있는 반성과 재발방지 조치가 앞서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평화공세’다. 한·미 공조 이간이고 남·남갈등 유발이란 지적에 김정은은 설득력 있는 반론을 내놓았으면 한다.
 
올림픽은 평화다. 그런데 북한은 늘 그 대척점에 있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훼방 놓으려 대한항공(KAL) 858기 폭파 테러를 저질렀다. 2007년 남북 정상 간에 합의한 10.4선언에서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남북 응원단 참가’를 약속하고도 깨버렸다. 북한은 올림픽에 대해 “지난 100여년 기간 진보와 반동, 정의와 부정의와의 첨예한 대립과정을 거치며 심각한 정치투쟁으로 일관된 노정을 걸어왔다”(『조선대백과사전』 2001년판)고 깎아내린다. 평창 겨울올림픽을 “동족의 경사”라며 반색하고 나선 김정은의 속내가 미덥지 않은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로 긴장이 높아진 한반도에서 열리는 겨울올림픽에 국제사회는 주목한다. 미 유력 일간 워싱턴포스트(WP)는 31일(현지시간) “김정은이 ‘올리브 가지’를 한국에 내밀었다”고 전했다. 정부가 평창 올림픽 기간 중 한·미 합동 군사연습의 잠정적 연기까지 검토하는 것도 이런 분위기 때문이다. 북한 제안 하루 만에 문재인 대통령은 ‘환영’의 뜻을 밝혔고, 조명균 통일부 장관은 “9일 고위급 회담을 열자”며 반색하고 나섰다. 하지만 김정은의 도발과 대남 극언 때문에 등 돌린 국민감정은 온도 차가 크다. “우리는 네가 지난 시기 저지른 일을 모두 기억하고 있다”는 목소리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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