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본문

 "남조선 TV 시청 말라"…해외공관 北방송전용 셋톱박스
이영종 기자 사진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lee.youngjong@joongang.co.kr

"남조선 TV 시청 말라"…해외공관 北방송전용 셋톱박스

중앙일보 2017.12.13 01:00 종합 30면 지면보기
북한의 역주행은 상상을 초월한다. 이번엔 외교무대인 해외 공관에서 시대 흐름에 반하는 일을 벌인다. 현지 TV 방송이나 한국과 서방 드라마·가요 접촉을 엄단한다며 괴상한 장치 하나씩을 의무적으로 설치했다. 평양에서 보내는 체제 선전 방송과 김씨 일가 우상화 콘텐트만 볼 수 있는 일종의 셋톱박스다. 최고의 엘리트 그룹 중 하나인 외교관과 그 가족까지 엮어 체제단속의 고삐를 당겨야 하는 북한의 딜레마를 들여다봤다.
 

‘만방 사업’으로 이름 붙여진 특수장치 보급 사업은 아주 은밀하게 추진됐다. 해외 외교공관이나 무역대표부에서 일하는 외교관과 대표뿐 아니라 가족에게도 함구령이 내려졌다. “밖으로 알려지면 공화국(북한)의 이미지가 흐려지고, 악의적 입소문이 날 수 있다”는 이유였다. 서방 외교가에서는 지난달부터 북한이 해외 공관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장비를 공급하고 있다는 얘기가 솔솔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우리 대북정보 당국도 최근 구체적 내용을 파악했다고 한다.
 
중앙일보가 12일 단독 입수한 장비와 관련 설명서 등에 따르면 장치 이름은 ‘망(網)TV 다매체 열람기’로 붙여졌다. 인터넷망을 통해 북한의 신문·방송과 영상·도서·문헌 정보 등을 제공한다. ‘다매체’는 멀티미디어의 북한식 표현이다. 우리의 인터넷TV 셋톱박스와 유사한 모양을 띠고 있다. 기억용량(메모리) 8G에 USB 2.0 포구(포트) 2개가 달려 있으며 MP4와 Divx 등 동영상 재생을 지원한다.
 
‘만방’이란 이름이 붙여진 이 서비스에 대해 북한 만방정보기술보급소 측은 “TV 실시간 시청과 편집물 요청, 신문·통신 등 문서열람과 검색기능 등이 제공된다”고 밝히고 있다. 북한 내부 사정에 정통한 대북소식통은 “북한 당국이 자체 개발한 이 장치는 해외에서 북한TV와 노동신문을 보거나 검열을 마친 영화·도서를 검색할 수 있도록 고안됐다”며 “서방 매체의 TV나 인터넷 영상물 등에 접촉하는 걸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고 말했다. 북한 체제 찬양과 우상화 선전 관련 정보만을 제공한다는 얘기다.
 
북한의 해외 공관 정보통제 체계

북한의 해외 공관 정보통제 체계

북한은 지난해 7월 태영호 영국 주재 북한 공사의 탈북·망명을 계기로 대책 마련에 부심해 왔다. 해외에 근무하는 외교관과 대표부 멤버 등이 한국과 서방의 정보물을 접한 뒤 체제를 등지는 사례가 빈번해진다는 판단에서다. 태 전 공사는 한국 도착 직후 인터뷰에서 “북한 해외 공관원들이 휴대전화를 통해 한국의 뉴스와 영상을 접하고 세계를 이해하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지난 6월에는 베이징에 나와 있던 북한 경공업대표가 남한TV 드라마를 보다가 적발돼 평양으로 소환조치되기도 했다. 소식통은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격노했고 직접 실태 파악과 대책 수립을 지시한 적이 있기 때문에 그동안 북한 외무성과 국가보위성 등이 고심해 왔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체 해외 공관을 대상으로 이런 조치가 취해질 수 있는 것도 김정은의 지시사항이기 때문이란 얘기다.
 
북한은 이 장치를 대사관 구역(담장 내부에 조성된 주거단지 포함)은 물론 외부의 공관원·대표 가정에도 의무적으로 설치토록 하고 있다. 북한 해외 공관의 경우 대사와 보위원, 서기관급 2명, 경제참사 등으로 기본 구성되며 가족을 포함하면 15명 안팎이다. 해외 80~90개국에 외교공관과 대표부 등을 두고 있다. 소식통은 “가구당 2000달러(약 218만원)의 장비 구입 및 설치비를 강제로 내도록 하는 바람에 불만을 사고 있다”고 귀띔했다.
 
만방 시스템과 설명서를 살펴본 정보통신 전문가는 “우리의 인터넷TV 컨버터와 유사한 형태라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USB를 이용해 한국 TV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경우 어떻게 파악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든다. 이에 대해 전문가는 “평양에서 송출하는 북한 관련 TV 영상과 문헌 정보만을 볼 수 있도록 하고 다른 정보는 철저히 차단하는 통제장치를 갖추고 있다”고 말했다. 다른 채널을 선택하거나 선로를 바꿔 금지된 방송이나 콘텐트를 접할 경우 기록이 남을 수 있도록 고안됐고, 불시 단속을 통해서도 검열이 가능할 것이란 설명이다.
 
북한은 지난해 8월 만방 체계에 대해 관영TV를 통해 소개한 바 있다. 당시 김정민 만방정보기술보급소장은 “국가망에 가입한 기관·기업소나 가정에서 중앙TV나 용남산·체육·만수대 방송을 실시간 시청할 수 있고 이미 방영된 편집물도 다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북한 주민에게는 인터넷 접속이 허용되지 않아 만방 시스템을 통해서는 외부의 방송이나 콘텐트에 접속할 수 없다. 이번에 해외 공관에 보급하고 있는 장치는 인터넷 환경 속에서 사용하는 점을 감안해 보안성을 크게 높였을 것이란 지적이다.
 
그동안 북한의 해외 공관에서는 태국 위성을 이용해 북한이 송출하는 조선중앙TV 영상을 시청해 왔다. 대사 집무실을 제외한 대사관 건물과 단지 내 북한 시설에선 한국과 서방의 뉴스·영상물이나 영화·드라마 등은 물론 현지 TV 시청도 금지됐다. 하지만 외부에 거주하는 경우 TV와 위성방송을 몰래 시청하는 일이 빈번했다고 한다. 해외 공관에서 일하다 탈북한 고위 인사는 “국가보위성 소속 안전영사가 가끔 단속을 나오지만 사전에 귀띔해 주는 경우가 많았다”고 말했다.
 
노동신문의 경우 인터넷 사이트에 접속해 출력한 내용을 복사해 대사관원이나 가족들이 돌려 보도록 하는 방식을 썼다고 한다. 탈북 인사는 “해외의 다양하고 흥미로운 영상물과 음악이 넘쳐나는데 누가 만방 체계를 이용해 따분한 김정은 찬양 프로그램이나 문헌자료를 볼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북한도 이런 점을 의식한 듯 이달 초 조선중앙TV를 HD(고화질)급으로 업그레이드하고 뉴스에 주민들의 현장 반응을 담는 등 제한적이나마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북한의 70여 년 노동당 통치는 식량배급과 정보통제라는 두 축으로 버텨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외부 세계를 접할 수 없는 2500만 주민들은 ‘지상낙원’과 ‘이밥에 고깃국’ 선전에 속아 왔다. 하지만 해외생활을 통해 허구임을 자각한 외교관과 외화벌이 기관원들은 체제이반을 꿈꾸고 있다.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 ‘화성-15형’을 쏘아올리고 ‘국가 핵무력 완성’을 선언하는 김정은의 목소리가 높아질수록 절망하는 게 이들 계층이다. 국제사회의 싸늘한 시선과 비난을 외교전선에서 온몸으로 받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세계만방(世界萬邦)에서 따왔을 ‘만방’은 국제화와 개방을 상징한다. 하지만 북한이 보급에 열중하고 있는 만방체계는 고립과 폐쇄로 가는 안간힘으로 읽힌다. 시대의 조류인 4차산업, 인공지능(AI)과도 거리가 멀다. 그 이름값을 못하고 있다.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배너

이영종의 평양 오디세이

구독하기를 하시면 기사 업데이트 시
메일로 확인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