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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포럼] 김상조 위원장, 다만 …

중앙일보 2017.12.07 01:57
서경호 논설위원

서경호 논설위원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은 교수 시절부터 군더더기 없이 말 똑 부러지게 잘하는 전문가로 통했다. 그에겐 특유의 어법이 있다. ‘다만’이라는 부사를 즐겨 구사하며 앞의 발언을 더 정교하게 다듬곤 한다. 공정위원장이 된 이후에도 오랜 습관은 여전했다. 지난 10월 국회에서 열린 공정위 국정감사 하루에만 ‘다만 어법’은 수십 번 되풀이됐다. 이런 식이다. “네이버는 시장지배적 사업자로서 지위 남용의 소지가 있고 많은 민원이 제기되고 있다. 다만 이것이 미래 산업의 문제이기 때문에 매우 신중하게 검토하고 있다.” “(재벌 개혁) 열심히 하고 있다. 다만 시장에 큰 충격이 없도록 지속 가능하고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진짜 하고 싶은 말을 ‘다만’ 뒤에 붙이는 경우도 있다. 역시 같은 날 국감에서 공정위의 경제분석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는 질의에 이렇게 답했다. “내년 중에 박사급 인력 4명을 충원하기로 했다. 다만 이 정도로는 턱도 없다고 생각한다.” 지난달 5대 그룹 경영자와 만나 모두발언을 할 때도 ‘다만’ 뒤쪽에 힘이 실려 있었다. “5대 그룹이 선도적으로 상생협력 방안을 실천하는 것에 감사한다. 다만 국민께 약속한 공약과 국정과제 목표에 비춰볼 때 기업들의 자발적인 개혁 의지에 여전히 의구심이 남아 있다.” 김 위원장은 이날 “딱딱한 규제를 통해 마치 칼춤을 추듯이 접근하는 기업 개혁을 할 생각 없다” 등의 유화적 발언도 했지만 언론은 공익재단과 지주회사 전수조사를 거론한 대목을 대서특필했다. 이 회동 후 다른 자리에 참석해 가볍게 내뱉은 “재벌 혼내주고 오느라고 늦었다”는 말은 구설에 올랐다.
 
‘다만 김상조’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자주 구사되는 그의 ‘다만 어법’을 나는 경제학자의 직업병 비슷한 것으로 생각했다. 비용과 편익을 균형 있게 따지고 남들이 빛나는 것만 얘기할 때 굳이 어두움도 함께 짚어 주는 게 경제학자다. ‘다만 김상조’가 창백한 이론가가 아닌 현실주의자의 면모를 보여 주는 것이라면 그는 지금 고민이 많을 것이다. 재벌의 권한과 책임을 일치시키는 재벌 개혁을 밀어붙여 J노믹스의 한 축인 공정경제에서 성과를 내는 한편 평소 소신대로 한국 경제의 귀중한 자산인 재벌의 생산력을 훼손시켜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재벌 개혁은 공정거래법만이 아니라 상법·세법·자본시장법·금융관련법 등 여러 규율 수단이 체계적이고 합리적으로 어우러져야 지속 가능한 성과를 얻는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다만, 요즘 대기업에 쏟아지는 규제들이 현실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선을 넘지 않았는지도 검토했으면 한다. 대기업 스스로 개혁하라는 메시지도 더 분명하게 가다듬어야 한다. 재계에선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고치라는 얘기인지 잘 모르겠다”고 하소연한다. 자칫하면 뒷골목 힘자랑하는 이들의 말처럼 오해될 수 있다. 눈 부라리며 ‘너, 알아서 해라’는 말이 어둠의 세계에선 제일 무서운 말이다. 경쟁정책이 재벌 군기를 잡는 얼차려 도구로 쓰인 흑역사를 재계는 기억한다. 구체적 방향을 제시하기 힘들면 그냥 일감 몰아주기 등 잘못된 행위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법에 따라 제재하면 된다.
 
김 위원장은 취임사에서 경쟁법의 목적은 경쟁을 보호하는 것이라면서도 경쟁자 보호, 즉 을의 눈물을 닦아 달라는 사회적 요구도 무시하지 않겠다고 했다. 반대방향으로 뛰어가는 두 토끼를 다 잡겠다는 큰 포부는 알겠는데, 현실과의 괴리가 크다. 자칫하면 게도 구럭도 다 잃을 수 있다. 갑을 관계에서 억울함을 호소하는 민원은 두 배로 늘어났는데 실제 사건 처리는 예전만 못하다고 한다. 위원장은 신속하면서도 공정하고 투명한 사건 처리를 강조하는데 직원들은 버거워한다. 일을 빨리 하려면 아무래도 완성도가 떨어지고, 완성도를 높이려면 일 처리가 늦어진다. 결국 을의 눈물을 닦아 주는 데도 선택과 집중이 중요하다. 이게 다만, 내가 하고 싶은 얘기다.
 
서경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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