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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재의 시시각각] 비트코인과 튤립

중앙일보 2017.12.07 01:53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요즘 다시 뜨는 얘기가 있다. 튤립 광란(tulip craze) 얘기다. 때는 1500년대 말. 독일의 한 남자가 웅장한 정원을 거닐다 꽃 한 송이를 발견했다. 곧게 뻗은 초록색 줄기와 터번 모양의 부드러운 붉은색 꽃잎. 완벽한 자태다. 그는 이런 꽃을 이전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주인에게 꽃 이름을 묻는다. “튤립입니다. 콘스탄티노플에서 왔지요.”
 
남자는 꽃을 사 아내에게 선물했다. 며칠 뒤 친구가 집에 들렀다. 친구 역시 튤립의 자태에 반한다. 입소문이 퍼졌다. 이런 식으로 튤립 열풍이 일어났다. 마침내 열풍은 독일을 건너 네덜란드까지 상륙했다.
 
네덜란드는 튤립 광풍을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발전시켰다. 튤립을 사고파는 거래소가 생겼다. 온갖 종류의 튤립 농장이 들어섰다. 투자 클럽까지 만들어졌다. 1634년 튤립 구근 한 개는 양 300마리 값에 팔렸다. 흰색 줄무늬 꽃을 가진 희귀종 셈페르 아우구스투스 구근 값은 5500플로린까지 치솟았다. 당시 황소 64마리 값이다. 튤립 열풍은 네덜란드 산업 전체를 멈춰세운다. 빵은 왜 만들며, 옷은 왜 수선하나. 튤립 하나만 있으면 큰 성의 주인도 될 수 있는데.
 
1637년의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 튤립을 팔려고 내놨지만 하루 종일 아무도 오지 않는다. 다음날도 같은 일이 반복됐다. 마을엔 튤립 값이 예전 같지 않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공포가 덮친다. 상인들은 2000플로린, 500플로린으로 튤립 가격을 내렸다. 하룻밤 새 수천 명의 튤립 상인이 파산했다. 농부·수입업자·은행원 수천 명이 직장을 잃었다. 돈을 잃은 사람은 부지기수다. 비난과 마녀사냥이 시작됐다. 평생 모은 돈을 투자한 튤립 투자자, 튤립 열풍을 부추긴 언론, 너무 많은 튤립을 재배한 농부들 모두 죄인이 됐다. 네덜란드엔 마침내 길고 암울한 경기 침체가 닥쳤다.
 
튤립 대신 비트코인을 넣어 보자. 때는 2009년. 나카모토 사토시가 비트코인을 만들었다. 해킹이 불가능한 블록과 이를 연결하는 체인. 완벽한 암호화폐다. (중략)…. 한국은 비트코인 광풍을 다른 차원으로 발전시켰다. 암호화폐 거래소 세계 1위가 한국에 생겼다. 다단계 피라미드 유사수신 사기꾼들이 극성을 부린다. 지난달 세계 최초로 비트코인이 1만 달러를 돌파한 곳도 한국이다. 하루 거래금액이 3조원을 넘어섰다. 24시간 암호화폐를 사고파는 ‘비트코인 좀비’ ‘폐인’이 쏟아진다. 공부는 왜 하며, 직장엔 왜 나가나. 비트코인만 있으면 재벌도 될 수 있는데.
 
물론 아직 비트코인에 ‘그러던 어느 날’은 오지 않았다. 언제 그날이 올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특정 자산의 미래 가치를 재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케인스는 1935년 “우리는 철도, 구리광산, 런던의 빌딩 등의 10년 후 산출량(가치)을 잴 수 있는 지식이 때로는 아예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고 했다. 하지만 폴 크루그먼, 조셉 스티글리츠, 장 티롤 같은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들은 “(내재적 가치가 없기 때문에) 비트코인의 가치가 0으로 폭락할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말한다. 그날이 오면 길고 암울한 경기 침체가 닥칠 수 있다. 거품이 클수록 충격도 클 것이다.
 
정부는 4일 법무부가 주축이 돼 대책 마련에 나섰다. 만시지탄이 있지만 그럴수록 신중해야 한다. 거품은 한꺼번에 누르면 바로 터진다. 서서히 바람을 빼는 연착륙이 필요하다. 비트코인은 한국인의 투기 본능을 자극하고 있다. 과거 선물·옵션 같은 파생상품 거래를 허용하자 바로 압도적 세계 1위를 기록했던 한국이다. 400년 전 네덜란드를 휩쓸었던 투기 광풍의 최전선에 한국이 서 있다. 잘못 다루면 나라가 흔들릴 수 있다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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