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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보통사람 임꺽정

중앙일보 2017.12.07 01:47
박정호 논설위원

박정호 논설위원

아둔패기라는 말이 있다. 아둔한 사람을 낮잡아 이를 때 쓴다. 최근 전 20권으로 복간된 만화가 이두호(74)씨의 『임꺽정』에 자주 등장한다. 2년 반 전 이씨를 만난 적이 있다. 당시 그는 김주영 원작의 『객주』(전 10권)를 13년 만에 다시 냈었다. 『임꺽정』 또한 세 번째 복간이다. 웹툽 전성시대에 나온 두껍고 두꺼운 종이만화, 아둔패기의 용단이 아닐지 모르겠다.
 
반가운 마음에 이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70대 중반의 그가 뜻밖에 “아직도 철부지인 것 같다”고 했다. “조금 철이 드니까 알겠는데 20여 년 전 연재 당시 역사를 좀 더 충실히 공부했어야 했다”고 돌아봤다. 일례로 포항 지진을 꺼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지진 기록이 심심찮게 나오는데 처음 만화를 그릴 때 이를 생각하지 못했다며 아쉬워했다. “지진을 과학이 아닌 미신으로 받아들이던 시절, 계급·신분에 따른 지진에 대한 여러 반응을 넣었더라면 얘기가 더욱 풍성해졌겠죠.”
 
이씨는 자료광·메모광이다. 1991년부터 5년 넘게 스포츠신문에 『임꺽정』을 연재하면서 홍명희의 원작 소설은 물론 『대동야승』 『기재잡기』 등 96가지 책을 참고했다. 국어사전을 끼고 살았고, 고증을 위해 박물관·민속촌도 수없이 다녔다. 의적 임꺽정이 활동한 16세기 조선의 혼란스러운 사회상이 생생한 건 이 같은 발품·손품 덕이다. 그럼에도 그는 ‘철부지 타령’을 하고 있다. 작가의 공부는 끝이 없는 모양이다.
 
지난 며칠 만화 『임꺽정』에 푹 빠졌다. 당대 인간 군상이 지금 봐도 낡지 않다. 힘겨운 시대를 버텨 간 민초의 아픔이 마치 오늘 일처럼 다가온다. 백성을 짓밟는 탐관오리가 사라진 시대라지만 하루하루 바투며 살아가는 우리네 일상은 크게 다르지 않다. 째마리(못난 사람이나 물건)에 무한 애정을 보여 온 노작가 또한 ‘영웅 임꺽정’보다 ‘보통사람 임꺽정’을 주목한다.
 
이씨는 지금도 현역이다. 매일 오전 9시 부천시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작업실에 출근 도장을 찍는다. 주간신문 ‘백세시대’에 삽화를 그리고, 주변 스케치에도 열심이다. “집권층과 백성의 갈등은 동서고금의 일이죠. 그래도 역사는, 인권은 조금씩 발전해 왔습니다. 철이 조금 일찍 들었더라면 웹툰도 했을 텐데요. 하하하.” 그의 웃음에서 오늘을 이겨 내는 아둔패기의 내일을 본다.
 
박정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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