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뭣이 중헌디, 곡성 70 ~ 80대 할머니들 짠한 시 그림책 냈다

중앙일보 2017.12.07 01:00
『눈이 사뿐사뿐 오네』(도서출판 북극곰)를 펴낸 전남 곡성군 입면 할머니들이 6일 자신들의 모습이 그려진 마을 ‘길작은도서관’ 담벼락에서 시 그림책을 들어보이며 환하게 웃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눈이 사뿐사뿐 오네』(도서출판 북극곰)를 펴낸 전남 곡성군 입면 할머니들이 6일 자신들의 모습이 그려진 마을 ‘길작은도서관’ 담벼락에서 시 그림책을 들어보이며 환하게 웃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어메는 나를 낳고 “또 딸이네.”/ 윗목에 밀어 두고 울었다/ 나마저 너를 미워하면/ 세상이 너를 미워하겠지/ 질긴 숨 붙어 있는 핏덩이 같은/ 나를 안아 들고 또 울었다/ 하늘에서는 흰 눈송이가/ 하얀 이불솜처럼/ 지붕을 감싸던 날이었다(안기임 할머니의 시 ‘어쩌다 세상에 와서’)
 
『눈이 사뿐사뿐 오네』 표지. [사진 도서출판 북극곰]

『눈이 사뿐사뿐 오네』 표지. [사진 도서출판 북극곰]

산골에 사는 평범한 70~80대 할머니들이 시가 담긴 그림책을 펴냈다. 전남 곡성군 입면에 사는 김막동(82)씨 등 평균 연령 78세의 할머니 7명이 주인공이다. 시골에서 깨·대추·고추 농사를 하는 70세부터 84세 사이의 할머니들이 농사를 짓는 마음으로 정성껏 지은 시 18편이 실린 그림책은 『눈이 사뿐사뿐 오네』(사진)다.
 
이 책에는 하얀 눈과 관련된 할머니들의 삶 속 추억과 애환을 표현한 시들이 담겨 있다. 안기임(84) 할머니는 시 ‘어쩌다 세상에 와서’에서 눈이 오던 날 사내가 태어나길 바랐던 시어머니 앞에서 딸을 낳아 서러움을 느끼면서도 자신을 따뜻하게 품은 어머니를 표현했다.
 
눈이 와서 나뭇가지마다/ 소박소박 꽃이 피어 좋다/ 눈사람도 만들고/ 아버지가 만든 스케이트 갖고/ 신나게 타다 본께/ 해가 넘실넘실 넘어가고/ 손이 꽁꽁 얼었다/ 집에 들어간께 엄마가/ “춘데 인자 오니/ 인자사 들어오니/ 어서 방으로 들어가그라/ 손발이 다 얼었다 내 새끼.” 한다(양양금 할머니의 시 ‘눈이 많이 왔다’)
 
할머니들의 시는 맞춤법이 틀리기도 하고 사투리를 쓰는 등 많이 투박하다. 하지만 그래서 더 정감이 있다. 시와 함께 할머니들이 직접 그려 넣은 그림들도 화려하진 않지만 정겹게 다가온다.
 
할머니들이 책을 낸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김막동 할머니 등 9명은 지난해 봄 시집 『시집살이 詩집살이』를 출간해 관심을 모았다. 2009년부터 시작한 한글 공부 끝에 이뤄낸 첫 작품이었다. 이번 시 그림책은 건강이 좋지 않아 요양병원에서 생활 중인 할머니와 체력이 달려 참여하지 못한 할머니 등 2명을 제외한 할머니들이 다시 한번 뭉쳐 만들었다.
 
어린 시절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공부할 기회가 없어 시는커녕 한글도 잘 몰랐던 할머니들이 시집을 낸 건 마을 ‘길작은도서관’ 김선자(47) 관장과의 인연에서 시작됐다. 원래 전남 진도에서 살던 김 관장은 2009년 할머니들이 사는 마을로 이사를 왔다.
 
“이사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도서관 개관 준비를 도와주시던 할머니들이 책을 거꾸로 세워 책장에 놓는 것을 보고 한글을 잘 모르신다는 사실을 알게 됐죠. 그때부터 매주 이틀씩 한글 수업을 진행했습니다.”
 
할머니들은 매주 화·목요일 오후 7시부터 9시까지 한글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농사일로 피로가 쌓여 무거운 몸을 이끌고 수업에 참여했다. 초등학교 문턱도 밟아보지 못한 이들이 대다수였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한글을 공부했다. 곡성군과 전남 문화관광재단이 할머니들의 공부와 시집 출간을 지원했다.
 
할머니들은 서툴지만, 진솔한 이야기가 담긴 이번 시 그림책을 손주들과 젊은이들이 읽어주길 바란다고 했다. 할머니들 역시 눈이 내리면 설레던 어린 시절이 있었고,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존재이며 애환 속에서도 삶을 헤쳐나간 사실을 알려주고 싶어서다.
 
박점례(70) 할머니는 “이게 시가 맞는가 싶을 정도로 어려움을 느꼈는데 그림책이 나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이 기쁘다”며 “젊은 사람들이 많이 보고 할머니들의 마음을 이해해준다면 더욱 좋겠다”고 말했다.
 
김선자 관장은 “할머니들의 소중하고 아름다운 삶이 사라지는 게 안타깝다”며 “이 책을 통해 할머니들의 삶이 오랫동안 기억되길 바란다”고 했다.
 
곡성=김호 기자 kim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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