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본문

“이 여성이 아니라면 평생 독신”-평민과 결혼 물꼬 튼 왕세자

“이 여성이 아니라면 평생 독신”-평민과 결혼 물꼬 튼 왕세자

중앙선데이 2017.12.03 00:00
 
영국 찰스 왕세자의 차남인 해리 왕자(33)가 미국 할리우드 배우 메건 마클(36)과 약혼하고 내년 5월 결혼하기로 한 뉴스로 세상이 떠들썩하다. 마클은 결혼 경력이 있는데다 아버지가 백인이고 어머니가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다. 영국 왕실은 이를 계기로 비로소 ‘열린 시대’를 맞았다는 평가를 얻고 있다. 결혼에선 인간적인 매력과 끌림이 중요할 뿐, 신분·나이·과거·인종은 장애 요인이 되지 못하는 21세기 사회 풍속도를 반영했다는 분석도 설득력을 얻는다. 하지만 휘게 지역인 스칸디나비아와 비교하면 영국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더욱 매력적이고 개방적이며 가슴을 적시게 하는 왕실 로맨스가 펼쳐져 왔다. 노르웨이·덴마크·스웨덴 등 스칸디나비아 왕실의 ‘결혼 혁명’을 살펴본다. 
노르웨이 국왕 하랄 5세 부부. 하랄 5세는 왕세자 시절인 1968년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독신으로 살겠다"고 아버지에게 말해 왕족이나 귀족이 아닌 여성과의 결혼을 허락받았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왕족이나 귀족은 더 이상 '그들만의 리그'를 주장할 수 없게 됐다.

노르웨이 국왕 하랄 5세 부부. 하랄 5세는 왕세자 시절인 1968년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독신으로 살겠다"고 아버지에게 말해 왕족이나 귀족이 아닌 여성과의 결혼을 허락받았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왕족이나 귀족은 더 이상 '그들만의 리그'를 주장할 수 없게 됐다.

 
“이 여자가 아니라면 저는 평생 독신으로 살겠습니다.”  
노르웨이 국왕인 하랄 5세(80)는 왕세자 시절이던 1968년 아버지 올라프 5세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동갑내기 평민 소냐 하랄드센과 9년간 비밀연애를 한 끝에 결혼하겠다고 나섰다. 그때까지 노르웨이에서 평민 출신 왕세자빈은 없었다. 왕족의 연애결혼도 드물었다. 하랄 왕세자는 아버지 앞에서 배수의 진을 쳤다. 그는 올라프 5세의 유일한 직계 계승자였다. 아들의 굳은 의지 앞에 아버지는 마음을 움직였다. 정부도 둘의 결혼을 지지했다. 
 
노르웨이 국왕 하랄 5세와 소냐 왕비의 1968년 결혼식 공식사진.식

노르웨이 국왕 하랄 5세와 소냐 왕비의 1968년 결혼식 공식사진.식

이들은 그해 결혼하며 왕실에 새로운 전통을 세웠다. 국민은 왕족도 귀족도 아닌 왕세자빈을 반겼다. 민주주의 시대에 신분이란 건 왕가에서도 별 의미가 없음을 확인시켰다. 하랄 5세는 91년 왕위에 올랐으며 소냐는 노르웨이의 첫 평민 출신 왕비가 됐다.  
노르웨이 마르타 루이세 공주 부부.

노르웨이 마르타 루이세 공주 부부.

 
하랄 5세 부부는 딸과 아들을 하나씩 뒀다. 모두 평민과 결혼했다. 마르타 루이세 공주(46)는 2002년 작가인 아리 미카엘 벤과 결혼했지만 2016년부터 별거 중이다. 
노르웨이 호콘 왕세자의 결혼 사진. 왕세자빈이 전 남자친구에서 얻은 아들 마리우스를 결혼식장에 데리고 나왔다. 이런 솔직함이 왕실이 국민 지지를 얻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약점을 장점으로 바꾼 경우다.

노르웨이 호콘 왕세자의 결혼 사진. 왕세자빈이 전 남자친구에서 얻은 아들 마리우스를 결혼식장에 데리고 나왔다. 이런 솔직함이 왕실이 국민 지지를 얻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약점을 장점으로 바꾼 경우다.

 
호콘 왕세자(44)는 2001년 8월 결혼은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다. 난관이 한둘이 아니었다. 첫째, 왕세자빈이 된  메테마리트 회이비(44)는 미혼모였다. 둘째, 왕세자빈이 데려온 아들 마리우스 보르그 회이비의 아버지이자 이전 동거남인 모르텐 보르그는 마약과 관련 있는 인물이었다. 셋째, 왕세자 커플은 2000년 12월 약혼을 발표하며 이미 1년 전부터 동거하고 있다는 사실도 공개했다. 유럽에서 젊은이들의 혼전 동거는 일반적이지만 왕가에선 드물었다. 
 
노르웨이 호콘 왕세자와 메테마리트의 결혼식 공식 사진.

노르웨이 호콘 왕세자와 메테마리트의 결혼식 공식 사진.

 
일부에선 노르웨이에서 왕실이 과연 필요하냐는 논쟁까지 벌였다. 호콘 왕세자는 아버지 못지않게 현대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며 정면돌파를 시도했다. 젊은층은 왕세자의 선택이 왕실 품위손상이 아니라 신념 있는 결합이라며 커플을 지지했다. 이 결혼은 결과적으로 현대 왕실의 참된 권위가 격식이 아니라 진실한 마음과 용기 있는 사랑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확인시켰다.
노르웨이 호콘 왕세자 가족. 맨 오른쪽은 왕세자빈이 전 남자친구 사이에서 얻은 아들 마리우스. 왕위 계승권은 없지만 왕실의 당당한 일원으로 인정 받는다.

노르웨이 호콘 왕세자 가족. 맨 오른쪽은 왕세자빈이 전 남자친구 사이에서 얻은 아들 마리우스. 왕위 계승권은 없지만 왕실의 당당한 일원으로 인정 받는다.

 
호콘은 약혼식에서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과거 약혼할 때 사용했던 반지를 약혼녀의 손가락에 끼워주었다. 사랑은 차별하지 않는 법이다. 두 사람은 딸 잉그리드와 아들 스베레를 낳았다. 전 남자친구와 사이에서 낳은 마리우스도 왕실 가족으로 인정받고 있다. 다만 왕위계승권만 없을 뿐이다. 두 사람의 결합은  ‘21세기 최초의 신데렐라 스토리’다. 
 
덴마크 마르그레테 2세 여왕과 부군 헨리크. 부군은 프랑스 외교관 출신이다.

덴마크 마르그레테 2세 여왕과 부군 헨리크. 부군은 프랑스 외교관 출신이다.

 
덴마크 왕실도 결혼으로 바람 잘 날 없기는 마찬가지다. 72년 즉위한 마르그레테 2세 여왕(77)은 67년 프랑스 외교관 앙리 드 라보르드 드 몽페자(83)와 결혼했다. 몽페자는 결혼 뒤 덴마크에서 ‘여왕 부군 헨리크’로 불린다. 
덴마크 왕실 2004년 5월 결혼식 기념 사진. 프라데리크 왕세자와 호주 출신 메리의 결혼식이다.

덴마크 왕실 2004년 5월 결혼식 기념 사진. 프라데리크 왕세자와 호주 출신 메리의 결혼식이다.

 
 장남 프레데리크(49) 왕세자는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만난 호주 여성 메리 도널드슨(45)과 2004년 결혼해 슬하에 이란성 쌍둥이를 포함해 2남2녀를 뒀다.
덴마크 요아임 왕자와 첫 부인 알렉산드라의 결혼식.홍콩에서 자란 알렉산드라는 중국 혈통이 섞여 있으며 중국 이름(文雅麗)도 있다.

덴마크 요아임 왕자와 첫 부인 알렉산드라의 결혼식.홍콩에서 자란 알렉산드라는 중국 혈통이 섞여 있으며 중국 이름(文雅麗)도 있다.

 
차남 요아킴(48) 왕자는 두 차례 결혼을 모두 외국 출신과 했다. 95년 첫 결혼의 상대는 홍콩 출신 알렉산드라 맨리(53)였다. 알렉산드라는 혈통이 복잡하다. 알렉산드라의 부친 나이젤은 중국 상하이 출신으로 부계는 중국과 영국 혈통이고 모계는 프랑스다. 알렉산드라의 모친 크리스타는 체코와 오스트리아 혈통이다. 요아킴과 알렉산드라는 2남을 뒀지만 2005년 이혼했다. 
덴마크 요아임 왕자와 두 번째 부인 마리의 결혼식.마리는 프랑스 출신이다.

덴마크 요아임 왕자와 두 번째 부인 마리의 결혼식.마리는 프랑스 출신이다.

 
알렉산드라는 2007년 14세 연하의 영상작가 마르틴 죄르헨슨과 재혼했지만 2015년 가치관 차이를 이유로 헤어졌다. 요아킴 왕자는 2008년 프랑스 출신의 마리 카발리에(41)와 재혼해 1남1녀를 뒀다. 격식을 차리지 않는 휘게의 삶은 덴마크 왕실에서도 엿볼 수 있다. 
스웨덴 칼 16세 구스타프 국왕과 소피아 왕비. 1972년 뮌헨올림픽에서 귀빈과 통역으로 만났다.

스웨덴 칼 16세 구스타프 국왕과 소피아 왕비. 1972년 뮌헨올림픽에서 귀빈과 통역으로 만났다.

 
스웨덴 국왕인 칼 16세 구스타프(71)는 76년 외국인 평민과 결혼했다. 왕세자 시절인 72년 뮌헨올림픽 참관 당시 통역과 수행을 맡았던 실비아 조머라트(73)가 상대였다. 결혼식 전야제 갈라 콘서트에서 그룹 아바가 초연하며 실비아 왕세자빈에게 헌정한 노래가 바로 ‘댄싱 퀸’이다. 실비아 왕비는 독일인 아버지와 브라질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항공사 스튜어디스를 거쳐 뮌헨의 아르헨티나 영사관에서 근무하다 스웨덴 왕자를 만났다. 스웨덴어는 독일어·포르투갈어·프랑스어·스페인어·영어에 이어 실비아 왕비가 6번째로 구사할 줄 아는 언어다. 결혼 뒤 스웨덴 수화도 익혔다. 왕족이나 귀족이 아니어도 스웨덴에선 74년 만들어진 새 헌법에 따라 76년 왕비가 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헌법이 왕실 규범이나 왕위계승법보다 우위에 있기 때문이다.

스웨덴 빅토리아 왕세녀의 결혼식.남편은 빅토리아의 헬스트레이너였던 다니엘 베스틀링이다.

스웨덴 빅토리아 왕세녀의 결혼식.남편은 빅토리아의 헬스트레이너였던 다니엘 베스틀링이다.

 
국왕 부부는 1남2녀를 뒀는데 80년 왕위계승법이 바뀌어 ‘장남’ 대신 ‘첫 자녀’가 왕위를 물려받게 했다. 이에 따라 장남 칼 필립(38) 대신 장녀 빅토리아(40)가 왕위를 잇게 됐다. 빅토리아 왕세녀는 2009년 자신의 헬스 트레이너였던 평민 다니엘 베스틀링(44)과 결혼해 1남1녀를 낳았다.
 
칼 필립 왕자는 2015년 글래머 모델 출신인 소피아 헬키브스트와 결혼했다. 2010년 두 사람의 연애 사실이 드러나자 소피아는 왕자빈 자격이 없으며 왕실에서 환영받지 못할 것이라는 주장이 일부에서 제기됐다. 왕자는 “진실은 추측과 반대”라며 “소피아는 아무런 어려움 없이 왕실에서 환영받고 있다”라고 여자 친구를 용기있게 감쌌다. 그는 자신이 어린 시절 난독증으로 왕따를 당했던 것처럼 소피아가 일부 비판자에 의해 왕따를 당하고 있다고 비판해 국민의 공감을 얻었다. 두 사람은 2남을 낳고 잘 살고 있다. 차녀 마들렌(35) 공주는 2013년 영국 태생의 미국인 금융인 크리스토퍼 오닐과 결혼해 1남1녀를 낳고 뉴욕에서 거주한다. 외국 평민과 결혼해 해외로 이주한 셈이다. 
 
스웨덴 빅토리아 왕세녀와 다니엘 베스틀링과의 결혼식.

스웨덴 빅토리아 왕세녀와 다니엘 베스틀링과의 결혼식.

 
스칸디나비아에선 왕실 가족의 결혼을 둘러싸고 사회적 갈등도 있었고 왕족이 품위 없이 군다며 군주제 폐지론을 주장하는 사람도 나왔다. 하지만 숱한 난관을 하나하나 사랑으로 극복하는 과정을 지켜본 국민은 왕족에게 진정성을 느꼈다. 자리를 위해 사랑을 버리는 왕족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스칸디나비아뿐이 아니다. 네덜란드의 막시마 왕비(46)는 아르헨티나 출신에 부친이 군부독재 시절 농업장관을 지냈다. 빌럼알렉산더르 국왕(50)은 왕세자 시절 이런 문제를 정면 돌파해 사랑을 쟁취했다. 스페인 펠리페 6세 국왕(49)의 왕비 레티시아(45)는 방송사 아나운서 출신으로 이혼 경력이 있지만, 왕실의 격려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  
 
이들은 이런 일을 통해 여왕·국왕·공주·왕자라는 지위, 왕실 가족으로서의 위치, 국가에서 제공되는 금전적인 혜택과 상속 등을 받을 자격이 있음을 보여줬다는 평가다. 왕실 가족의 자유로운 결혼은 오히려 왕가의 존재 이유를 보여줬다. 왕가는 시대의 흐름을 거부하지 않았고 국민은 그런 왕실에 신뢰를 보내고 있다. 유럽에서 21세기형 왕실 전통이 형성되고 있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기자 정보
채인택 채인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