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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의 현문우답]붓다를 만나다(16)-깨닫는 순간에 싯다르타가 본 새벽별은 어떻게 생겼을까
백성호의 현문우답

[백성호의 현문우답]붓다를 만나다(16)-깨닫는 순간에 싯다르타가 본 새벽별은 어떻게 생겼을까

중앙일보 2017.11.30 02:37
백성호 기자 사진
백성호 중앙일보 종교담당차장 vangogh@joongang.co.kr
 
 
 
악마는 보리수 아래에 앉은 싯다르타를 공격했다. 폭풍과 불, 바위와 칼을 마구 휘둘렀다.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다. 악마가 일으킨 폭풍은 싯다르타의 옷깃조차 흔들지 못했다. 그뿐만 아니다. 쏟아지는 폭우에도 싯다르타의 몸은 젖지 않았다. 날아오던 바위와 불덩어리는 꽃이 되었고, 진흙더미는 향(香)으로 변했다.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이루었던 보드가야의 보리수. 그 뒤로 보드가야 사원의 대탑이 보인다. 백성호 기자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이루었던 보드가야의 보리수. 그 뒤로 보드가야 사원의 대탑이 보인다. 백성호 기자

 
왜 그랬을까. 싯다르타의 수행이 담벼락을 허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늘 ‘내가 세운 담벼락’이 있다. 담벼락 이쪽은 좋은 것, 저쪽은 나쁜 것이다. 이쪽은 아군이고 저쪽은 적군, 이쪽은 선(善)이고 저쪽은 악(惡)이다. 한 마디로 내게 좋으면 선(善)이고, 내게 나쁘면 악(惡)이다. 그런 담벼락을 누구나 품고 있다. 그 담벼락이 하나둘 모여서 에고가 된다.  
 
바람이 불었다. 나는 싯다르타가 앉았던 보리수 앞으로 갔다. 하늘을 덮는 잎들이 파랬다. 그 앞에 앉았다. 눈을 감았다. ‘싯다르타의 고민은 생로병사였다. 거기서 피어나는 삶의 고통이었다. 그건 정말 피할 수 없는 고통일까.’ 이 물음을 풀고자 싯다르타는 출가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고통은 언제 어디서나 피어난다. 그 출처가 사람이든, 일이든, 세상이든 말이다. 내가 세운 잣대에서 어긋나는 순간, 한 치의 오차 없이 고통이 올라온다. 싯다르타는 그걸 깊이 이해했다. ‘내 안의 고집’ 때문에 남북이 나뉘고, ‘내 안의 담벼락’ 때문에 동서가 갈림을 말이다.  
 
세상을 이리저리 쪼개는 내 안의 잣대가 바로 '내 안의 담벼락'이다. 그걸 허무는 과정이 수행이다.

세상을 이리저리 쪼개는 내 안의 잣대가 바로 '내 안의 담벼락'이다. 그걸 허무는 과정이 수행이다.

 
악마가 쏟아낸 불과 창과 폭우도 그랬다. 그건 담벼락 저쪽에서 날아오는 것들이었다. 담벼락이 있어야 불도 있고, 창도 있고, 폭우도 있고, 그리고 악마도 존재한다. 그럼 담벼락을 허물면 어찌 될까. 모두 소멸하고 만다. 가령 동독과 서독을 나누는 담벼락이 있다. 담벼락이 사라지면 어찌 될까. 서독도 없어지고, 동독도 없어진다. 대신 그 자리에는 통일 독일만 남는다. 더는 동서로 갈리지 않는 독일이다.  
 
선도 그렇고, 악도 그렇다. 둘은 담벼락 때문에 존재한다. 담벼락을 허물면 둘 다 사라진다. 그리스도교에서는 그걸 ‘선악과 이전으로 돌아간다’고 표현한다. 선악과를 따먹기 이전의 아담과 이브로 말이다. 신이 인간을 창조할 때 불어넣었다는 ‘신의 속성’‘하느님 나라의 속성’으로 돌아감을 뜻한다. 그래서 예수는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원수를 사랑하라”고 누누이 강조했다. 왜 그랬을까. 나와 이웃, 나와 원수를 가르는 ‘내 안의 담벼락’을 허물라는 말이다. 그게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자기 십자가’다.   
 
'내 안의 담벼락'을 부수는 일을 그리스도교에서는'자기 십자가를 짊어진다'고 표현한다.

'내 안의 담벼락'을 부수는 일을 그리스도교에서는'자기 십자가를 짊어진다'고 표현한다.

 
보드가야의 사원에 밤이 깊었다. 나는 일단 숙소로 갔다. 숙소 바깥은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리는 시골 분위기였다. 싯다르타는 새벽별을 보면서 깨달았다고 한다. 나는 궁금했다. 과연 어떻게 생겼을까. 싯다르타가 앉았던 보리수 아래로 가면 그 새벽별을 볼 수 있을까. 2600년 전에 싯다르타가 봤던 그 새벽별을 지금도 볼 수 있을까. 그 별은 어느쪽으로 뜰까. 얼마만한 밝기로, 얼마만한 크기로 반짝이고 있을까.  
 
새벽 5시였다. 나는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10분 정도 차를 타고 다시 금강좌의 보리수로 갔다. 이곳은 ‘불교 8대 성지’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곳으로 꼽힌다. 붓다가 깨달음을 성취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아직 새벽인데도 정문 앞에는 순례객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문이 열리길 기다리는 중이었다. 티베트에서 온 라마승, 스리랑카에서 온 순례객, 태국에서 온 수행자들, 금발에 푸른 눈을 한 서양인 부디스트들도 꽤 보였다.  
 
보리수 둘레에 세워진 울타리 사이로 싯다르타가 앉았던 금강좌가 보인다. 보리수 오른편 아래에 꽃들이 놓여 있는 사각의 돌이 금강좌다. 백성호 기자

보리수 둘레에 세워진 울타리 사이로 싯다르타가 앉았던 금강좌가 보인다. 보리수 오른편 아래에 꽃들이 놓여 있는 사각의 돌이 금강좌다. 백성호 기자

 
그들의 눈에서는 간절함이 읽혔다. 우리가 품는 고민과 싯다르타가 품었던 고민은 다르지 않다.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일.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삶의 여정에서 피어나는 고통. 거기로부터 자유롭고, 그래서 지혜롭게 사는 길. 다들 그걸 찾는다. 그래서 이곳으로 왔다. 붓다가 몸소 걸어갔던 그 길에서 무언가 발자국을 찾기 위해서였다.  
 
마침내 정문이 열렸다. 순례객들은 자신의 신을 벗어서 신발 주머니에 넣었다. 성지 안에서는 맨발로 다녀야 했다. 남방 불교의 전통이다. 보드가야 성지에는 높다란 대탑이 세워져 있었다. 대탑 주위에는 세계 각국에서 온 순례객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수행을 하고 있었다. 티베트의 승려들은 온몸을 땅바닥에 엎드리며 끊임없이 절을 하는 오체투지를 했다. 이마에서는 땀이 줄줄 흘렀다. 스리랑카의 순례객들은 줄지어 앉아 경전을 외고 있었다. 대탑 둘레의 크고 작은 탑들 사이에서 숱한 사람이 명상에 잠겨 있었다. 이처럼 보리수와 대탑 일대는 하나의 거대한 수행처였다.  
 
싯다르타가 앉았던 보리수 아래서 바라본 새벽하늘. 높이 뜬 달과 오른쪽 나뭇가지 사이로 새벽별이 보인다. 당시 하늘에 떠 있던 별은 하나 뿐이었다. 백성호 기자

싯다르타가 앉았던 보리수 아래서 바라본 새벽하늘. 높이 뜬 달과 오른쪽 나뭇가지 사이로 새벽별이 보인다. 당시 하늘에 떠 있던 별은 하나 뿐이었다. 백성호 기자

 
대탑 주위를 한 바퀴 돈 뒤 나는 보리수 아래로 갔다. 아직 어둑어둑했다.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봤다. 이리저리 찬찬히 살폈다. 별이 하나 보였다. 하늘을 향해 펼쳐진 보리수의 가지 옆으로 뜬 별. 새벽하늘에 남아 있는 단 하나의 별이었다. 나는 가슴이 뛰었다. ‘저 별이구나. 2600년 전에 싯다르타는 이 보리수 아래서, 이런 각도로 하늘을 바라보며, 저런 밝기로 반짝이는 새벽별을 봤구나. 바로 그 순간에 싯다르타는 자신을 온전히 허물고 우주와 하나가 되었구나.’
 
나는 카메라를 꺼내서 사진을 찍었다. 아직 어두워 잘 보이진 않았다. 그래도 숨은그림찾기처럼 자세히 보면 모래알처럼 반짝이는 새벽별이 사진에서 보였다. 감회가 새로웠다. 7년 전에 인도를 찾았을 때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보드가야의 보리수 위로 반짝이는 새벽별을 찾아볼 생각조차 못 했다.  
 
이른 새벽이었지만 보드가야의 보리수를 향한 순례객들의 발걸음은 끊이지 않았다. 백성호 기자

이른 새벽이었지만 보드가야의 보리수를 향한 순례객들의 발걸음은 끊이지 않았다. 백성호 기자

 
혹자는 “싯다르타가 새벽별 때문에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붓다 이후에 깨달음을 얻은 선지식들도 ‘각자의 순간’이 있었다. 누구는 방 문고리를 잡을 때 깨닫고, 누구는 그릇 깨지는 소리를 듣고 깨닫고, 누구는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보며 깨달았다. 그렇다고 문고리 때문에, 그릇 때문에, 화장실 때문에 깨달음이 온 건 아니다. 깨닫는 순간에 그들이 그걸 하고 있었을 뿐이다. 싯다르타도 마찬가지다. 새벽별 때문에 깨달은 게 아니라, 깨닫는 순간에 새벽별을 보고 있었을 따름이다.  
 
그렇다면 싯다르타가 봤던 진정한 새벽별은 무엇일까. 깨달음의 문을 연 그만의 새벽별은 대체 무엇일까. 깊은 명상 속에서, 치열한 수행 속에서 싯다르타가 겨냥했던 표적은 과연 무엇일까. 나는 그게 담벼락이라 본다. 나와 사람과 세상과 우주에 대한 착각의 담벼락이다. 싯다르타는 그걸 허물었다.  
 
보리수를 향해 티베트에서 온 순례객들이 오체투지를 하고 있다. 나무 바닥에 온몸을 던지듯이 엎드리며 절을 하고 있다. 일종의 수행이기도 하다. 백성호 기자

보리수를 향해 티베트에서 온 순례객들이 오체투지를 하고 있다. 나무 바닥에 온몸을 던지듯이 엎드리며 절을 하고 있다. 일종의 수행이기도 하다. 백성호 기자

 
담벼락이 무너진 세상은 달리 보인다. 그는 우리가 ‘있는 것(色)’이라 철석같이 믿는 걸 ‘없는 것(空)’이라 했다. 또 우리가 ‘없는 것(空)’이라 여기는 걸 ‘있는 것(色)’이라 했다. 그렇게 뚫린 눈으로 본 세상을 한 마디로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 함축했다. 거기에는 ‘붓다(Buddha)의 눈’이 담겨 있다.  
 
참 오묘하다. ‘붓다의 눈’에 다가갈수록 우리의 어깨가 가벼워진다. 죽을 때까지 내 가슴에 돌덩어리로 박혀서 절대 빠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과거의 상처’가 녹아내린다. 왜 그럴까. 그게 돌덩어리(色)인 줄 알았는데, 붓다의 눈을 통해서 보니 돌 모양의 비눗방울(空)에 불과함을 깨닫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두려움이 없어진다. 그리고 용기가 생긴다. 『숫타니파타』의 유명한 구절처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가 된다.  
 
보드가야 사원에는 크고 작은 탑들이 즐비하다. 그 사이에 앉아서 수행을 하고 있는 외국인 수행자들. 백성호 기자

보드가야 사원에는 크고 작은 탑들이 즐비하다. 그 사이에 앉아서 수행을 하고 있는 외국인 수행자들. 백성호 기자

 
사자는 왜 소리에 놀라지 않을까. 야수의 왕이라서 그럴까. 덩치가 커서 그럴까. 아니면 턱과 이빨이 강해서 그럴까. 아니다. 사자가 소리에 놀라지 않는 까닭은 단 하나다. 세상의 모든 소리(色)가 실은 비어있음(空)을 알기 때문이다(色卽是空). 비어서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라 ‘빈 채로 작용함(空卽是色)’을 알기 때문이다.  
 
싯다르타는 29세 때 카필라 왕국을 떠났다. 머리를 깎고 온갖 시행착오를 거치며 6년 고행을 했다. 그 끝자락에서 싯다르타는 내 안의 담벼락을 온전히 허물고 우주와 하나가 됐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 붓다가 됐다. 싯다르타의 나이 35세 때였다.  
 
보드가야의 보리수 바로 옆에 있는 사원의 불상. 남방에서는 꽃목걸이를 만들어서 불상에 거는 전통이 있다. 백성호 기자

보드가야의 보리수 바로 옆에 있는 사원의 불상. 남방에서는 꽃목걸이를 만들어서 불상에 거는 전통이 있다. 백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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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드가야(인도)=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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