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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이 간다] 대학 입시보다 힘들다는 유치원 입학 전쟁터 가보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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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강수 중앙일보 논설위원 cho.kangsoo@joongang.co.kr

[논설위원이 간다] 대학 입시보다 힘들다는 유치원 입학 전쟁터 가보니 …

중앙일보 2017.11.30 01:00
조강수의 세상만사 
25일 서울 마포청소년수련관에서 진행된 2018년 유아영어스포츠단 신입생 추첨 행사. 추첨에 쓰인 탁구공과 계란판이 보인다. 작은 사진은 29일 발표된 딸아이의 ‘처음학교로’ 자동추첨 결과. [조강수 기자]

25일 서울 마포청소년수련관에서 진행된 2018년 유아영어스포츠단 신입생 추첨 행사. 추첨에 쓰인 탁구공과 계란판이 보인다. 작은 사진은 29일 발표된 딸아이의 ‘처음학교로’ 자동추첨 결과. [조강수 기자]

유치원으로 가는 길은 ‘더 롱 앤드 와인딩 로드(The long and winding road·비틀스의 노래 제목)’였다. 멀고 험했다. 내년에 다섯 살이 되는 딸아이의 유치원 입학을 위해 지난주부터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땀나게 오가며 추첨에 응시했다. 낙방의 연속이었다. 엄마의 정보력과 아빠의 무관심, 할아버지의 경제력이 중요하다는 대학 입시에 비해 100% 추첨인 유치원 입학은 아빠의 부지런함이 필수고 운(運)이 결정타였다. 5~7세 아이를 둔 부모들이 매년 11~12월 치르는 유치원 입학 전쟁터에 직접 들어가 봤다. 부닥쳐 보니 온 가족이 동원된 ‘로또 맞히기 패밀리 비즈니스’였다.

 
토요일인 지난 25일 오전 10시 마포청소년수련관 2층 강당. 200여 명의 학부모와 가족 등이 가득 들어찬 가운데 부설 ‘유아영어스포츠단(KEST)’ 신입생 추첨이 시작됐다. 서울시의 지원 등으로 운영되며 원어민 영어와 수학 등의 교육에 체육 프로그램을 접목한 커리큘럼으로 인기가 높다. 이날 5세(만 3세) 반은 2학급 38명을 뽑았다.
마포유아스포츠단 신입생 추첨이 열린 25일 마포청소년수련관 2층 강당이 학부모들로 꽉 차 있다.

마포유아스포츠단 신입생 추첨이 열린 25일 마포청소년수련관 2층 강당이 학부모들로 꽉 차 있다.

 
160여 명이 지원해 본선 경쟁률은 4대 1. 추첨은 아이들의 지원서 접수번호가 적힌 탁구공을 추첨함에 넣고 하나씩 뽑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주최 측에서 첫 탁구공을 뽑고 그 당첨 학부모가 10개씩 뽑았다. 당첨 탁구공들은 30개들이 계란판 위에 나란히 놓였다. 장모가 받은 접수번호는 69번. 아내는 추첨 전에 이미 “숫자가 96번하고 분간하기 힘들다”며 걱정했다.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처음엔 ‘어어~’로 시작해 뒤로 갈수록 ‘이럴 수가~’라는 탄식이 절로 나오더니 38명 추첨이 금세 끝났다. 이 과정에서 객석의 한 학부모는 “추첨함을 세게 흔들어 주세요”라고 외쳤다. 탁구공이 골고루 섞이게 해 확률을 높여 달라는 주문이었다. 뒤이어 40명의 대기자 선발이 이어졌다. 설마 했는데 이번에도 숫자들이 69를 요리조리 비켜 갔다. 끝자리 9번과 60번대가 거의 당첨되고 68, 70번도 되고 마지막엔 96번까지 나왔는데 69번 탁구공만 끝내 간택받지 못했다. 결국 본선과 대기까지 합쳐 총 78번의 추첨에서 모조리 낙방했다. “마지막 나온 번호를 보고 울컥했어. 우리가 악마의 번호를 뽑았나 봐.” 못내 아쉬워하는 아내의 눈이 약간 충혈돼 있었다.
 
우리 옆자리에 앉아 외손주의 당첨을 고대하던 이율기(69) 할아버지 부부는 대기자 중 두 번째로 당첨되는 기쁨을 누렸다. 이 할아버지는 “광양에서 직장에 다니는 사위 대신 직접 추첨하러 나왔다”며 “‘처음학교로’ 사이트를 통해서도 3곳에 지원해 놓고 합격 발표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이 수련관 조미란(52·여) 운영부장은 “요즘은 무상교육인 초·중·고교에 유치원 3년이 더해져 학제가 15년이 된 것 같다”며 “지난해 7대 1에서 그나마 경쟁률이 낮아진 건 올해 한 학급 늘렸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경쟁 완화 방안으로 조 부장은 “지난 대선 때 후보들이 내놓은 공약대로 저출산의 영향으로 남아도는 초등학교 교실을 개조해 국공립유치원 공급을 늘리는 것도 방법”이라고 제시했다.
 
슬그머니 하루 전(24일) 남산의 L유치원 낙첨 기억이 되살아났다. 지난 20일 오전 9시 1착으로 원서를 냈음에도 3세 반 여아 15명의 당첨 구슬에 끼지 못했다.
마포구 '유아영어스포츠단' 직원들이 학부모를 상대로 추첨용 탁구공에 적힌 응시 번호를 확인하고 있다.

마포구 '유아영어스포츠단' 직원들이 학부모를 상대로 추첨용 탁구공에 적힌 응시 번호를 확인하고 있다.

 
두 차례 낙방 직후인 26일엔 마포·종로·용산구의 여섯 군데 유치원의 현장상태 확인을 위한 5시간 답사 강행군이 이어졌다. 아내는 10여 개 공략 대상 유치원의 위치·전형일시·특징 등의 정보를 담은 리스트를 직접 작성해 들고 다니며 등·하교 동선 및 주변 환경을 꼼꼼히 살폈다.
 
이전부터 해 온 현장 추첨과는 별개로 올해 학부모들은 온라인상의 지원에도 매달렸다. 정부가 올해 전국적으로 확대·개설한 온라인 지원시스템 ‘처음학교로’ 사이트에선 유치원 지원이 3곳까지 가능하다. 문제는 반쪽짜리 효과다. 국공립유치원(4700여 곳 중 국립 3곳)은 전부 참여하지만 사립유치원이 대거 불참해서다. 내년 원아 모집 마감일인 27일 현재 사립유치원(4282곳) 중 115곳(2.7%)만 참여했다. 국공립유치원은 전체의 52.6%, 사립유치원은 47.4%를 차지하지만 서울에선 역전돼 사립유치원이 75.9%, 국공립유치원이 24.1%다.
 
사립유치원들의 불참 이유에 대해 하유경 교육부 유아정책과장은 “학부모들이 선호하는 국공립유치원에 대한 쏠림현상이 나타나 국공립과 사립유치원이 서열화될까 걱정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하 과장은 과열 경쟁 배경에 대해선 “2012년 누리과정(만 3~5세 무상보육) 도입 이후 정부가 원아 1인당 22만원씩 지원했다”며 “그로 인해 유치원 또는 어린이집에 다니는 비율이 87%에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평균인 90%를 웃도는 93%로 높아진 영향도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일종의 풍선효과가 나타났다는 의미다. 이에 대해 국내 최대 사립유치원 연합체인 한국유치원총연합회의 이희석 수석부이사장은 “국공립유치원은 무상교육에 커리큘럼도 같지만 사립유치원은 학비가 들고 설립자의 철학에 따라 커리큘럼이 다양하다”며 “처음부터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달리기를 하라는 건 행정 편의주의적 발상”이라고 반박했다. 유치원 교육 경력 40년이라는 위성순 전국사립유치원연합회 회장은 “유치원 복수 지원 허용에 따른 허수 때문에 과열 경쟁으로 보이는 것이지 막상 뚜껑을 열어 보면 미달되는 유치원이 적지 않다. 사립은 시장 자율에 맡겨야 한다”고 말했다. 처음학교로 사이트는 접수 첫날인 22일 접속자 수가 많아 먹통이 됐다.
 
결국 아내는 29일 하루 직장에 휴가를 냈다. 사립유치원 3곳 원서 접수, 영어유치원 상담, E유치원 추첨(여아 4명 선발에 94명 지원) 참여 등의 스케줄을 소화하기 위해서였다. 이날 오후 4시 E유치원도 탈락했다. 참석자들 사이에선 "이민 가고 싶다. 이게 뭐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오후 7시 처음학교로 자동추첨 결과도 나왔다. 지원한 3곳 모두 꽝이었다. 대기순서도 292, 133, 25번째였다. 아내는 “여기저기 다 떨어지면 한 달 170만원짜리 영어유치원으로 보내야 할지 모른다”며 한숨지었다. 친구·동료들은 자녀 대학 입시가 어렵다며 혀를 차지만 늦게 난 딸을 유치원에 보내는 것도 참 어려웠다. 어느 유치원에 당첨되느냐에 따라 등·하교가 편한 곳으로 이사하는 ‘맹모삼천지교 계획’은 이미 나의 동의 없이 수립된 상태다. 이제 다음달 1~4일 유치원 4곳의 추첨 결과가 우리 가족의 운명을 가른다.
 
당장에라도 북한산에 올라 청와대를 향해 이렇게 외치고 싶다. “문재인 대통령님, 적폐 청산도 필요하지만 ‘적선(積善)’이 정말 중요합니다. 집 가깝고 안전한 유치원에 갈 수 있는 환경 좀 만들어 주세요. 저 아래 유치원 문 앞에는 47만여 아이의 가족들이 오늘도 줄을 길게 서 있습니다. 정말 갑갑해서 아뢰는 말씀입니다.” 지금 우리는 한 가족의 삶의 질이 아이 유치원 당첨에 따라 좌우되는 ‘로또 시대’를 살고 있다.
 
조강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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