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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의 평양 오디세이] 극장국가 북한 … ‘피바다’ 연극은 이제 막 내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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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 중앙일보 통일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lee.youngjong@joongang.co.kr

[이영종의 평양 오디세이] 극장국가 북한 … ‘피바다’ 연극은 이제 막 내려야

중앙일보 2017.11.22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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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권력 핵심부가 술렁인다. 노동당 위원장 김정은이 숙청의 칼을 빼든 것이다. 실세 부서인 북한군 총정치국이 된서리를 맞았다. 노동신문 간부들과 평양 방어부대 고위 인사도 하루아침에 몰락했다. 핵·미사일 도발 드라이브에 치중하던 김정은이 내부 단속 쪽으로 눈길을 돌리며 벌어진 일이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간부들은 숨죽이고 있다. 장성택 처형 4주년(12월 12일)을 앞두고 다시 불어닥친 김정은발 피바람을 진단한다.
 

북한 최고지도자의 성향과 속내를 엿볼 수 있는 고급 첩보는 한·미 정보 당국의 극비사항(top secret)이다. 두꺼운 방첩망을 뚫고 감청에 성공하거나 대화 내용을 입수하면 즉각 대통령에게 직보될 정도다. 김대중 정부 시절,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유럽에 머물던 부인 고용희와의 농밀한 대화를 현직 국가정보원장이 안줏거리 삼았다가 혼쭐 난 적도 있다. 당시 정보 당국은 고용희 소생인 김정철·정은 형제와 여동생 여정과 관련된 정보에도 공을 들였다. 10대의 나이지만 잠재적 권력 후보군에 있다는 점에서다.
 
스위스 베른 국제학교에 조기 유학하던 3남매의 여권 정보나 학적부·성적 등도 빠짐없이 비밀 파일에 담겼다. 김정은 관련 항목은 여전히 대북 정보맨들 사이에 내밀하게 오르내린다. 1999년 당시 15세이던 김정은에겐 한 살 연상의 여자친구가 있었다. 이 친구가 골초 수준으로 담배를 피워대는 김정은에게 전화를 걸어 담배를 끊을 것을 요구했다. 그런데 김정은의 입에서 차마 옮기기 어려운 상소리가 터져 나왔다. 국정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원장을 지낸 남성욱 고려대 외교통일학부 교수는 “굉장히 충격적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친구가 절대권력을 넘겨받으면 정말 큰일 나겠구나’ 하는 생각이 당시 들었다고 귀띔했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김정은은 아버지 김정일 사망(2011년 12월)으로 권좌를 물려받았다. 해외 유학파인 데다 젊은 리더십을 갖췄다는 점에서 개혁·개방에 대한 기대가 쏠렸다. 하지만 예전의 기질 그대로였다. 노동당과 군부의 60~80대 노간부들에게 볼썽사나운 하대와 인격 모독이 이어진다는 휴민트(HUMINT·인적 정보)가 잇따랐다. 국정원은 조선중앙TV가 방영한 김정은 등장 영상을 정밀 분석해 구체적인 언급 내용을 포착해 냈다. 북한이 음성을 의도적으로 없앴지만 입 모양으로 대화를 파악하는 독순술(讀脣術·lip reading)을 동원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심한 경우 대화의 절반 이상이 욕설로 채워질 정도였다고 한다.
 
김정은의 폭주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숙청과 강등이 수시로 이뤄져 마치 롤러코스터를 탄 분위기가 나타났다. 27세에 ‘대관식’을 치른 자신을 노련한 간부들이 어리다고 깔볼 것이란 자격지심에 사로잡힌 듯했다. 인민무력부장 현영철이 회의 중 졸았다는 이유로 처형되자 군 최고위 간부들 뇌리엔 ‘졸면 진짜 죽는다’는 구호가 새겨졌다. 최전방 초병과 다름없는 신세가 된 것이다. 김정은의 지시를 메모하지 않고 멀뚱거렸다가는 ‘수령 모독’으로 단죄받기 일쑤였다. ‘적는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북한판 ‘적자생존’이 이때 등장했다.
 
폭압적 리더십의 결정체는 장성택 처형 사태다. 김정일이 막내아들을 후계자로 낙점하며 후견인 삼아 준 고모부를 김정은 스스로 내친 것이다. ‘친인척도 무참히 살해하는데 나 같은 존재는…’이란 생각은 북한 권력의 핵심층을 공포에 떨게 했다. 업무상 과오로 철직(해임)되는 수준이 아니라 처형과 함께 가족도 정치범수용소나 산간 오지로 추방되는 상황은 악몽 그 자체다.
 
김정은의 폭정은 국경까지 넘어 국제 공안질서까지 농락하는 상황으로 번졌다. 지난 2월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이복형 김정남을 살해한 게 대표적이다. 몸을 숨긴 아들 한솔군까지 제거하려 든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완수해야 비로소 끝나는 명령을 의미하는 ‘스탠딩 오더(standing order)’가 내려진 셈이다. 소위 백두혈통의 적통(嫡統)을 잇는 김정남을 향한 증오와 저주에 동복(同腹)형인 김정철까지 주눅 들었다. 후계순위를 동생에게 빼앗긴 김정철은 생존을 위해 ‘제구실 못하는 저를 보살펴 주는 크나큰 사랑을 베풀어 주셨다’는 취지의 충성맹세문까지 썼다는 게 국정원의 국회 정보위 보고다.
 
문명사회의 분노는 거세지고 있다. 권력 유지를 위해 간부들을 내키는 대로 처형·숙청하는 정권에 등을 돌렸다. 형제를 서방의 국제공항에서 금단의 독극물(VX)로 살해하는 김정은에게 경악했다. 핵과 미사일 도발로 한반도와 국제사회의 운명을 농락한 장면까지 오버랩되면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미국이 20일(현지시간) 김정은 체제를 ‘살인정권(murderous regime)’으로 낙인찍으며 테러지원국으로 재지정한 건 당연한 귀결이다. “오래전에, 수년 전에 했어야 할 일”이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말에 별다른 이견이 달리지 않는 것도 이런 이치다.
 
노동신문은 어제 자에 승리자동차연합기업소를 방문해 파안대소하는 김정은의 모습을 실었다. 하지만 웃는 게 웃는 게 아닐 수 있다. 핵·미사일 도발에 따른 국제사회의 대북제재 압박은 전례 없이 전방위적이고 끈질긴 모양새다. 북한은 잔뜩 긴장하고 있다. 황병서 총정치국장과 김원홍 제1부국장을 처벌한 것도 유엔 대북제재 국면과 무관치 않다는 게 당국의 분석이다. 추가 도발 카드도 마땅치 않은 국면이라 김정은의 고뇌는 깊을 수밖에 없다.
 
집권 6년 동안의 김정은식 질풍노도 통치는 이제 파산의 길목에 접어들었다. 아버지이자 선대 수령인 김정일이 공들였던 유산은 물거품이 됐다. 영변 핵시설 냉각탑 폭파 쇼까지 벌여 가며 가까스로 테러지원국 리스트에서 벗어난 지 9년 만에 재지정 수모를 맞았다. 김정일은 지금 이승을 내려다보며 “조금 더 후계수업을 시킬 수 있었더라면…” 하고 안타까워할지 모른다. 김정은도 지금쯤 “아버지라고 왜 핵실험하고 미사일을 쏘아 올리고 싶지 않았을까”란 생각에 회한을 느낄 공산이 크다. 세상이 그리 녹록지 않다는 깨달음이다.
 
핵과 미사일을 거머쥔 채 국제사회를 향해 펼쳐 온 화려한 쇼는 끝났다. 핵심 권력 간부들의 명줄을 쥐락펴락하던 숙청극도 마찬가지다. 국제사회의 집단지성은 김정은이 총감독을 맡은 시대착오적 이벤트에 몸서리치고 있다. 극장국가 북한이 연출한 피비린내 나는 가극과 숭배의식은 이제 무대에서 영원히 내려져야 한다.
 
◆극장국가
과시의 정치로 통치되는 국가를, 화려한 의례·공연을 하는 극장에 빗댄 개념. 인류학자인 C 기어츠(Geertz)가 19세기 네덜란드 통치하의 발리 통치구조를 분석해 제시했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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