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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문 대통령도 장관보다 비서를 좋아하는가

중앙일보 2017.11.15 01:43
이철호 논설주간

이철호 논설주간

적폐청산 칼바람이 매섭다. 검찰의 국가정보원 특활비 청와대 상납 수사는 사용처까지 뒤지는 분위기다. 만약 박근혜 전 대통령이 미용시술이나 옷값으로 최순실에게 일부라도 건넸다면 보통 문제가 아니다. 국민 정서가 또 험악해진다. 이명박(MB) 전 대통령에 대한 사이버사령부 댓글 수사도 마찬가지다. MB가 구속된 김관진 전 국방부 장관 등 아랫사람에게 모든 책임을 떠밀면 비겁해진다. 한국 보수정치는 설 땅을 잃는다.
 
요즘 이런 시나리오 뒤에는 ‘백원우’라는 이름이 어른거린다. 언론들도 ‘백원우 민정비서관이 적폐청산을 주도하고 있다’는 보도를 쏟아낸다. 몇 가지 간접적 흔적도 있다. 자유한국당은 지난달 24일 임종석 비서실장과 백 비서관을 직권남용으로 검찰에 고발했다. 두 사람이 총리실을 건너뛰어 각 부처에 적폐청산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하라는 공문을 발송했기 때문이다. MB 측근들도 “백원우가 배후”라고 지목한다.
 
청와대에서 백 비서관의 위치는 독특하다. 그는 권력의 두 기둥인 친노와 전대협 출신의 교집합이다. 전대협의 핵심 포스트인 연대사업국장을 지낸 데다 2002년 일찌감치 노무현 후보 정무비서가 됐다. 여기에다 지금은 권력기관을 지휘하고 민감한 정보를 받는 민정비서관이다. 그는 또 보수정치권과 악연이 뿌리 깊다. 2009년 5월 노 전 대통령 영결식장에서 MB를 향해 “사죄하라, 어디서 분향을 해”라고 고함을 쳤다. 이 일로 그는 곧바로 보복을 당했다. MB의 이영호 고용노사비서관이 그의 친인척·보좌진까지 가혹하게 사찰한 것이다. 그래서 보수 야당은 “백 비서관이 그 앙갚음을 하고 있다”며 핏대를 세우고 있다.
 
적폐는 청산해야 한다. 하지만 현재의 적폐청산은 문제가 있다고 보는 사람이 적지 않다. 압박수사로 변창훈 서울고검 검사 등 3명이 줄줄이 자살한 때문만은 아니다. 첫 단추를 잘못 꿰어 마치 밀실에서 음모론을 꾸며낸 듯한 냄새를 풍기기 때문이다. 이번 적폐청산은 문 대통령이 추석 직후 청와대 수석회의에서 “적폐청산은 사정이 아니다. 속도감 있게 추진하라”고 지시하면서 발동이 걸렸다. 만약 국무회의에서 적폐청산을 결정했다면 어땠을까. 야당이 직권남용이라고 반발할 엄두를 못 내고 청와대가 “발송한 공문은 업무지시가 아니라 협조요청”이라고 얼버무릴 필요도 없었다.
 
이철호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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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문 대통령은 국무회의보다 수석회의에서 중대 발표를 하기 일쑤다. 7월 17일에는 “최저임금 1만원은 사람답게 살 권리를 상징한다”며 최저임금 인상의 포문을 열었다. 지난달 16일엔 “장시간 노동과 과로를 당연시하는 사회가 계속돼선 안 된다”며 근로시간 단축을 지시했다. 우리 공동체에 큰 영향을 미칠 사안들이 수석회의에서 ‘지시’ 형태로 내려온다.
 
이에 비해 국무회의는 초라하다. 인사 참사로 76일간 전임 정부 장관들과 어색한 동거 국무회의는 문제였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국무회의는 몰카방지 대책, 아동수당법 통과 등 주로 이벤트성으로 흘러갔다. 10월 2일 임시공휴일 지정으로 열흘간 황금연휴가 생긴 것 외에 뚜렷이 기억에 남는 국무회의가 없다.
 
적폐청산 같은 국가적 중대 사안은 국무회의에서 논의하는 게 맞다. 그래야 뒤탈이 안 난다. 박 전 대통령도 비선에 의지하다가 탄핵당하지 않았는가. 우리 헌법은 국무회의를 중요 정책의 최고 심의기관으로 못 박고 있다(88, 89조). 국무회의는 장관들이 의견과 지혜를 모아 대통령의 독주를 견제하고 균형을 잡는 헌법적 장치다. 우리 헌법 정신에 따르면 TV 화면에 수석회의보다 국무회의가 더 자주, 더 비중 있게 나와야 한다.
 
요즘 개인적으로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의 행보를 눈여겨보고 있다. 그는 대통령비서실장과 백 비서관이 내려보낸 적폐청산 TF를 구성하라는 공문을 보고 “왜 총리실을 통하지 않느냐”며 이를 거부했다. “제도와 문화를 바꿔야지 왜 사람을 청산하려 하느냐”며 선을 그은 것이다. 그는 7월 경제장관 회의에선 “100대 국정과제를 하려면 증세가 불가피한 만큼 대국민 토론을 요청하자”고 했다. 청와대가 자꾸 ‘캐비닛 문건’을 흔들어댈 때는 “권력을 잡은 쪽에서 문건을 발표하니 정쟁으로 번진다”는 쓴소리도 했다. 국민 눈높이에 맞는 상식적 문제 제기였다.
 
만약 국무회의에서 적폐청산을 정식으로 심의했다면 김부겸 장관은 청산 속도는 늦추고 수준은 낮추자고 하지 않았을까 싶다. 지금처럼 전대협과 친노 출신으로 구성된 청와대의 이너서클에서 특정 사안을 밀어붙이면 독주하기 십상이다. 동종교배는 엄청난 부작용을 낳는다. 적폐청산이 자칫 국민 눈에는 원한과 복수로 비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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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호 이철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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