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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보편요금제 밀어붙이는 정부 … 통신비에 발목 잡힌 5G

중앙일보 2017.11.15 01:00
김도년 산업부 기자

김도년 산업부 기자

비밀리에 잡은 호텔 방에 전지 한장을 펼친다. 유성 매직으로 은행·캐피탈·상호신용금고(현 저축은행) 등 개별 금융업권의 이름을 적는다. 그리고는 업권별 예금·대출금리를 적어 나간다. 이렇게 정한 금리는 재정경제부(현 기획재정부) 상부 보고를 거쳐 시장에 발표된다. 시장이 자금의 수요·공급에 따라 금리를 정하는 건 불경이다.
 
관치가 횡행한 80년대,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이 회고하는 사무관 시절 풍경이다. 하지만 이동통신시장에선 이런 풍경이 옛이야기로 느껴지지 않는다. 데이터 1GB·음성 200분을 3만원대에 제공하던 서비스를 2만원으로 강제 인하하는 ‘보편요금제’가 정부 입법 예고절차를 마무리하고 규제개혁위원회 심사를 기다리고 있다.
 
보편요금제는 이통사 경영 방식을 송두리째 바꿀 복병이다. 소비자에게 25%의 요금 할인율을 적용한 선택요금 할인제나 취약계층 요금을 월 1만1000원씩 깎아주는 기존 가계 통신비 절감 대책과는 차원이 다르다. 기업 신용등급을 매기는 한국신용평가는 보편요금제에 1300만 명가량이 가입한다고 가정하면, 이통 3사의 영업이익이 매년 2조원가량 줄어들 것으로 예상했다. 한신평은 “보편요금제는 기업 신용도에도 영향을 줄 만한 변수”란 의견을 냈다.
 
기업 신용도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은 보편요금제가 매년 일정한 손실만 내고 끝날 사안이 아니란 의미다. 신용이 낮은 사람은 돈을 빌릴 때마다 더 비싼 이자를 줘야 하는 것처럼, 기업도 신용도가 내려가면 자금 조달 비용이 계속해서 늘어날 수 있다. 국내에서 가장 많은 가입자를 보유한 SK텔레콤도 매년 총자산의 6분의 1인 4조원가량 채권을 발행해 돈을 빌린다. 이자율이 1%만 올라도 400억원가량의 이자비용이 늘어날 수 있다. 한 기업신용(크레딧) 연구원은 “이통사 회사채는 5~10년 동안 안심하고 투자할 만큼 인기가 있지만, 보편요금제로 신용도가 하락한다면 투자자들은 더 높은 금리를 요구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외국인 주주를 모시고 있는 이통사도 이런 현실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예상 손실에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는 것은 주주에 대한 배임이기 때문이다. 송민준 한신평 실장은 “이통사들은 현재 보편화한 데이터 무제한 요금제를 폐지하거나 5세대(5G) 이동통신망 구축을 늦추면서 손실에 대비할 수도 있다”고 관측했다.
 
신평사가 내놓은 “5G 투자 속도가 늦어질 수 있다”는 전망은 결코 쉽사리 넘길 사안은 아니다. 이는 곧 한국의 4차 산업혁명 진행 속도가 늦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물인터넷(IoT)·빅데이터·인공지능(AI)·자율주행 차 등 4차 산업혁명으로 일컬어지는 대부분의 신사업이 모두 5G 통신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가 강조하는 ‘혁신 성장’이란 곧 미래 산업을 통해 경제 성장을 모색하는 것 아닌가.
 
사정이 이런 데도 대통령 직속 4차 산업혁명위원회는 아무 말이 없다. 장석영 4차 산업혁명위원회 지원단장은 “다른 부처에서 논의하는 사안에 일일이 의견을 내는 것은 위원회의 역할에 맞지 않는다”고 선을 그었다.
 
통신비 논란을 보노라면, 정부의 시계가 국가가 가격을 정하던 시절로 돌아간 것이 아닌가 싶다. 통신비 부담을 줄이지 말자는 게 아니다. 풍선 효과를 낳을 수 있는 시장 가격에 섣불리 개입할 생각은 하면서 그다음에 벌어질 일을 대비하지 않는 모습이 안타깝다는 것이다.
 
김도년 산업부 기자 kim.don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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