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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의 평양 오디세이] 대화보다 대남 평화 공세에 대비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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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 중앙일보 통일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lee.youngjong@joongang.co.kr

[이영종의 평양 오디세이] 대화보다 대남 평화 공세에 대비할 때다

중앙일보 2017.10.18 01:00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지난 7일 북한 평양에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2차 전원회의를 열고 당 중앙위와 중앙군사위 등에 대한 인사개편을 단행했다고 노동신문이 8일 보도했다. (노동신문) 2017.10.8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지난 7일 북한 평양에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2차 전원회의를 열고 당 중앙위와 중앙군사위 등에 대한 인사개편을 단행했다고 노동신문이 8일 보도했다. (노동신문) 2017.10.8

북한의 도발 기류가 주춤하자 서울발 대화·협상론이 고개를 든다. 대북특사 파견설이 모락모락 피어나고, 당국회담 재개나 인도 지원 주장도 이어진다.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북미국장의 방러 일정에 맞춘 남북 접촉 구상도 제기됐다. 문재인 대통령도 요 며칠 평화와 대화 메시지에 무게를 싣는 분위기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대북 압박에 탄력을 붙이고, 유럽연합(EU)이 강력한 대북 독자제재를 내놓는 등 국제사회의 움직임과는 결이 확 다르다. 북한 김정은의 예상 행보를 짚어 보고 대응책을 살펴본다.
 
임기를 한 달도 남기지 않은 2003년 1월 말 김대중(DJ) 대통령은 대북특사를 파견했다. DJ의 대북책사인 임동원 전 국가정보원장과 출범을 앞둔 노무현 정부의 대북정책을 짠 이종석(2006년 통일부 장관 취임) 대통령직인수위원이 공군기를 타고 평양으로 향했다. “북한에 DJ·노무현 정부 인수인계를 사전 신고하러 가는 것이냐”는 비판이 나왔지만 강행됐다. 특사단은 DJ의 친서를 가져갔다. 고농축우라늄(HEU) 핵 개발 의혹과 남북 문제, 새 정부와의 관계 등 3가지 내용이 담겼다. 하지만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지방 방문을 핑계로 만나 주지 않았다. 면담을 낙관했던 청와대와 정부는 “김 위원장이 절대적 위치지만 그를 못 만났다고 다 망가진 것처럼 볼 일은 아니다”고 군색한 해명에 나서야 했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오랜 기간 남북 당국회담에 관여해 온 베테랑 요원 사이에선 “받아야 특사”란 말이 있다. 최고당국자 간의 소통이란 막중한 의미가 부여되지만 기대에 못 미치거나 아예 특사 면담이 불발되면 큰 낭패를 볼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특사 카드가 자꾸 거론되는 건 쾌도난마식의 해결을 기대하는 심리 때문이다. 조명균 통일부 장관은 지난 8월 말 당국회담 제안에 북한이 끝내 호응해 오지 않자 “여건이 된다면 특사 교환을 적극 추진한다는 입장”이라고 말했다. 한 관계자는 “경색된 남북 관계를 톱다운(Top-down) 방식으로 푸는 단초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마치 마약 같은 유혹에 빠져들게 된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게 이 관계자의 조언이다. 지금의 남북 관계 단절이나 갈등은 특정 현안을 둘러싼 입장 차가 아닌 김정은의 핵·미사일 도발 때문이고, 북·미 간에 풀어야 할 성격이 크다는 것이다. 특사 파견 제안을 북한이 받아들일 상황도 아닌데 공연히 스타일만 구길 것이란 지적도 나온다.
 
정부는 당국대화 재개에도 공을 들인다. 통일부는 13일 국회 외교통일위 업무현황 보고에서 “남북 관계를 복원하고 지속 가능하게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지난 5월 정부 출범 이후 무더기로 승인해 준 131건의 대북 접촉도 지원한다는 방침이다. 국민 비판 여론 속에 강행한 800만 달러(약 90억4600만원)의 대북 지원 결정도 집행할 시기를 엿보고 있다.
 
정부가 이처럼 남북 관계 복원에 속을 태우는 건 나름대로 속사정이 있다. 대북 문제는 지난 9년간의 보수정부 집권시기와 차별화할 수 있는 최적의 아이템이다. 진보진영은 DJ·노무현 집권시기 두 차례의 남북 정상회담 개최 등 절대 우위에 있다. 그렇지만 정부 출범과 함께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이라는 엄혹한 현실에 직면했다. 김정은의 극단적 도발 노선에 국민 여론은 들끓었고, 국제사회도 냉담해졌다. 어쩔 수 없이 문 대통령도 북한을 ‘적(敵)’이라 지칭해야 했고, 핵실험 때는 “참으로 실망스럽고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는 입장도 냈다. 생각을 같이한다고 여긴 일부 인사로부터 “문 대통령이 완전히 아베 신조 일본 총리처럼 돼 가고 있다”(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는 비판까지 받았다. 보수세력과 비판적인 진보 사이에 낀 형국이다. 이대로 핵·미사일 쓰나미에 휩쓸려 가다간 이명박 정부의 광우병 사태나 박근혜 대통령 집권 때의 세월호 참사 같은 재앙이 될 수 있다. 내년 6월 지방선거에도 영향을 미칠 공산이 크다.
 
정부가 내년 2월 평창 겨울올림픽의 북한 선수단 참여를 통해 남북 관계 돌파구를 열려는 것도 이런 배경으로 보인다. 상황은 녹록지 않다. 앞서 변곡점으로 기대했던 6·15 공동선언 기념일이나 8·15 광복절은 북한의 호응이 없어 그냥 넘겼다. 2차 남북 정상회담 공동선언(10·4 선언) 10주년과 추석이 겹친 지난 4일도 겨냥했다. 하지만 북한은 노동당 전원회의 개최를 통해 체제 내부 조직을 다지는 데 집중했다. 우리 정부의 마음이 바빠지는 이유다.
 
더 큰 문제는 북한이 곧 대대적 평화 공세에 나설 공산이 크다는 점이다. 북한은 6차 핵실험 이후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 화성-14형과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발사 채비를 진행 중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하지만 미국과 세계를 겁박할 다른 도발 카드는 없는 상황이다. 핵 공격이나 워싱턴 타격은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김정은은 지금 “칼은 칼집에 있을 때 더 위력적”이란 말을 실감하고 있을지 모른다. 핵이야말로 베일에 싸인 채 은근한 위력을 투사할 때 최고의 가치를 발휘할 수 있는 무기 체계다. 핵탄두를 앞에 놓고 파안대소하고 노동신문에 공개하는 과시욕의 대상은 결코 아니란 얘기다.
 
핵과 미사일 도발로 자초한 대북제재는 김정은 정권의 숨통을 조이고 있다. 어떤 제재에도 굴하지 않겠다고 호언하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번의 경우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기 때문인지 ‘대북제재 피해조사위’도 꾸렸다. 평양과 지방 도시에서는 연일 미국의 대북제재를 비난하고 결사항전을 외치는 군중대회가 열린다. 자성남 유엔 주재 북한대사는 지난 11일 “대북제재로 교과서와 학습장은 물론 어린이 영양을 위한 생산까지 엄중한 난관이 조성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민생을 외면한 채 핵과 미사일 도발로 제재 국면을 자초한 김정은에 대해 국제사회는 싸늘한 시선을 보내고 있다.
 
사면초가의 위기 속에서 김정은 체제는 생존 전략 차원의 대화 국면을 탐색하는 것으로 보인다. 최선희 북미국장을 러시아에 파견해 이란 핵협상에 관여한 웬디 셔먼 전 미국 국무부 차관과 1.5트랙(반관반민) 접촉을 하는 건 그 신호탄이다. 이르면 내년 1월 김정은 신년사를 통해 선보일 평화 공세 리스트는 핵·미사일만큼이나 파격적일 수 있다. 핵무장 완성을 선언하며 재래식 전력의 남북한 동시 군축을 주장하고, 한미연합사 해체와 주한미군 철수 등을 주장하는 상황이다. 이를 위한 군축회담을 제의하며 이산가족 상봉이나 교류·협력사업을 제안해 올 경우 우리 사회는 큰 논란과 분열에 휩싸일 수 있다. 대화에 목말라하는 문재인 정부엔 자칫 ‘죽음의 오아시스’가 될 수 있다. 대화보다 대남 평화 공세를 더 경계하고 대응책을 짜야 하는 이유다.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이 기사의 취재·편집은 정영교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원이 기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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