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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3주 요리에 3000만원 받는 크루즈 … 4년간 190차례 36개국 레시피 배워

중앙일보 2017.10.14 01:00
국내 최초 특급호텔 여성 총괄 셰프 안나 김
안나 김 제주신화월드 F&B 총괄 디렉터는 “근무 태도가 일정하고 요리가 섬세하다는 점이 여성 셰프의 장점”이라고 했다. [사진 제주신화월드]

안나 김 제주신화월드 F&B 총괄 디렉터는 “근무 태도가 일정하고 요리가 섬세하다는 점이 여성 셰프의 장점”이라고 했다. [사진 제주신화월드]

고든 램지, 피에르 가녜르, 조엘 로뷔숑, 알랭 뒤카스 등 세계적인 스타 셰프의 공통점? 남성이다. 국내도 마찬가지다. 특히 특급호텔의 총주방장 자리는 ‘감히’ 여성이 넘볼 수 없는 벽이었다. 이 벽을 허문 사람이 제주신화월드 F&B 총괄 디렉터 안나 김(48) 셰프다. 파리 ‘라틀리에 드 조엘 로뷔숑’ 페이스트리 수셰프(부주방장), 하와이 ‘노부’ 수셰프 등 미쉐린(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에서 경력을 쌓은 그는 럭셔리 크루즈인 코스타 크루즈 총주방장을 거쳐 한국을 떠난 지 25년 만인 2016년 여름 한국으로 돌아왔다. 신화월드에 들어서는 특급호텔 메리어트(12월 개관)와 서머셋의 파인 다이닝부터 테마파크 분식 메뉴까지 책임지고 있는 그를 최근 제주에서 만났다.
 
파인 다이닝을 거쳐 럭셔리 크루즈호를 총괄하던 셰프가 핫바 같은 분식 메뉴를 구상하는 데 거부감은 없나.
“만약 내가 이삼십대였다면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그 나이엔 ‘요리’를 사랑했다면 지금은 요리를 먹는 ‘사람’을 사랑한다. 누군가를 즐겁고 기쁘게 하는 요리라면 어떠한 요리라도 해야 한다. 모든 요리는 소중하다. 어제 값비싼 미쉐린 레스토랑에서 맛있게 먹었다고 오늘 먹는 몇천원짜리 김치찌개가 맛없는 건 아니니까. 셰프는 모든 고객에게 인상적인 요리를 해야 한다.”
 
어릴 적 꿈이 셰프였나.
“전혀. 환경공학을 공부했다. 1991년 건축으로 전공을 바꿔 UC버클리로 유학 갔다. 넉넉한 형편이 아니라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는데 우연히 지중해 음식점에서 일하게 됐다. 처음엔 돈이 목적이었는데 하다 보니 천직이라고 느꼈다. 한 달 만에 매니저로 진급했다. 결국 학교를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요리에 뛰어들었다. 제대로 배우고 싶다는 생각에 캘리포니아 컬리나리 아카데미(CCA)에 들어갔다. 까다로운 양고기 해체도 가장 빨리 마치는 등 두각을 나타내자 선생님이 파리 르 코르동 블루 유학을 권했다. 그곳에서 퀴진(조리)과 페이스트리(제과) 과정을 모두 수료했다.”
 
안나 김 제주신화월드 F&B 총괄 디렉터. [사진 제주신화월드]

안나 김 제주신화월드 F&B 총괄 디렉터. [사진 제주신화월드]

국내 최초의 특급호텔 ‘여성’ 총괄 셰프다. 여성이라 어려운 점은 없었나.
“타고난 체력 덕분인지 다행히 없었다. 오히려 안정성 같은 여성적 덕목은 도움이 됐다. 남자는 갑자기 욱하고 사고를 치기도 하지만 여자는 근무 태도가 일정하고 요리도 섬세하다. 유럽에서 부러웠던 건 성별이 아니라 나이였다. 유럽에선 10대에 요리를 시작해 20대 초반이면 수셰프에 오른다. 간절히 바랐던 공부인 만큼 누구보다 열심히 했지만 10년이나 늦은 셈 아닌가.”
 
졸업 후 여러 스카우트 제의 중 ‘조엘 로뷔숑’을 택했다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
“미쉐린 레스토랑이지만 정통 프렌치가 아니라 컨템퍼러리 프렌치를 지향하는 곳이다. 정통보다 변화, 새로움을 추구한다. 2년 동안 페이스트리 수셰프로 일하다 퀴진으로 옮겼다. 정확한 계량이 필요한 페이스트리보다 개성을 담을 수 있는 요리가 적성에 맞았기 때문이다. 이후 레스토랑 고를 때도 새로움을 중요하게 여겼다. 파리에서 일할 때 보니 수셰프가 거의 다 일본 사람이더라. 일식을 배우고 싶다고 생각했고 미국에 돌아와 ‘노부’를 택했다. 이곳 역시 정통 일식이 아니라 다양한 요리가 섞여 있고 새로운 시도도 좋아한다.”
 
크루즈 경력이 인상적이다.
“웨스트할리우드의 고든 램지 레스토랑에서 일하던 2009년 태국에서 열린 세계요리대회에서 심사위원을 맡았다. CNN 방송을 본 코스타 크루즈에서 연락이 왔다. 동양인이면서 다양한 나라의 요리에 익숙한 셰프를 찾고 있었다면서. 3주 크루즈 승선에 3000만원이 넘는 액수를 제시했다. 처음엔 휴가를 내고 참여했다. 이후 함께 일하자는 제안을 받아 아예 옮겼다. 크루즈는 육지의 식당과 전혀 다르다. 하루에 많게는 6만 인분 식사를 준비해야 한다. 주방 길이만 180m다. 또 기상 상황에 따라, 승객의 종교나 직업에 따라 메뉴도 다르다. 4년 동안 190번의 크루징을 하며 36개국 요리를 해야해서 많이 배울 수 있었다.”
 
25년 만에 한국에 돌아온 이유는.
“솔직히 한국이나 한국 음식이 그리웠던 적은 없다. 새로운 것을 배우고 익히느라 바빴다. 그런데 4년 동안 크루즈에서 일하며 많이 지쳤다. 1년에 200일은 배 위에 있었다. 내가 탄 크루즈를 포함해 4개 크루즈를 총괄하느라 하루 24시간 긴장 상태였다. 기상 상황이 바뀌면 메뉴를 바꿔줘야 하니 아예 전화기를 얼굴 위에 올려놓고 자야 했다. 이러다 죽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목표는.
“내 인생의 균형을 맞춰나갈 거다. 스승으로 모셨던 한 프랑스 셰프가 ‘셰프 일은 육체적으로 힘들고 시간을 많이 뺏기는데 성공한 셰프란 인생의 행복까지 놓치지 않은 사람이라는 걸 잊지 말라’고 했다. 나이가 들수록 그 말의 의미를 알 것 같다. 내가 제주도에 온 것도 같은 이유다.”
 
[S BOX] 나은선·하진옥 셰프, 특급호텔 유리천장 뚫기 앞장
흔히 특급호텔 주방을 군대에 비유한다. 남성 중심의 문화인 데다 서열문화가 강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근무하는 여성 셰프의 수도 적은 편이다.
 
서울의 특급호텔 중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서울과 인터컨티넨탈 서울 코엑스은 두 호텔을 합해 300명의 셰프가 있는데 이 중 여성은 20%인 60명이 전부다. 다른 호텔에 비하면 그나마 많은 편이다. 서울신라호텔은 20여 명, 롯데호텔서울은 23명, 더 플라자는 6명뿐이다.
 
수는 적지만 여성 셰프들은 30여 년 전부터 줄곧 호텔 주방 문을 두드려 왔다. 그 결과 아직 서울의 특급호텔에선 여성 총주방장이 나오지 않았지만 몇몇은 의미 있는 자리에 올라 영역을 넓혀 가고 있다.
 
2011년부터 2017년 3월까지 인터컨티넨탈 서울 코엑스의 퓨전 아시안 레스토랑 ‘아시안라이브’를 이끈 나은선(47) 총괄 셰프가 대표적이다. 나 셰프는 현재 연회 담당으로 옮겼다.
 
2017년 1월엔 하진옥 셰프가 해비치호텔앤드리조트의 제주파인다이닝 ‘하노루’를 총괄하게 됐다. 하 셰프는 “남성 위주의 주방 문화에, 체력적으로도 힘에 부쳐 여러 번 고비를 겪었다”면서 “내 뒤를 잇는 여성 후배 셰프들에게 길을 열어주겠다는 생각을 하며 버텼고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힘이 난다”고 말했다.
 
제주=송정 기자 song.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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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정 송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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