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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하나로 부동산 광풍을 몰고온 사나이!

중앙일보 2017.10.13 19:09
중국의 개혁개방하면 으레 덩샤오핑을 떠올립니다. 그가 오늘의 중국을 만든 전략적 설계, 즉 개혁개방을 선도한 인물이기 때문이죠. 그러나 각론으로 가면 얘기는 달라집니다. 수많은 인재가 각 분야에서 국가 개혁을 위해 피눈물을 흘리지 않았다면 언감생심, 오늘의 중국은 없었을 게 분명합니다. 그 수많은 인재 중 주목해야 할 인물이 하나 있습니다. 차오젠밍(曹建明·62) 최고 인민검찰원 검찰장. 한국의 검찰총장에 해당합니다. 당황스럽게도(?) 그는 중국의 토지개혁을 주도해 개혁개방의 종잣돈을 마련한 걸물입니다.
업무 보고하는 차오 검찰장 [사진 신화망]

업무 보고하는 차오 검찰장 [사진 신화망]

그는 장쑤(江蘇) 성 난퉁(南通) 태생입니다. 화둥(華東) 정법학원에서 국제법을 전공한 법학자지요. 석사 학위도 갖고 있고 장시간 교수를 했으니 관료라기보다 학자가 맞습니다.  
 
그의 집안은 별 볼 일이 없었습니다. 요즘 말로 흙수저 출신입니다. 17세에 고교를 졸업하고 상하이에 있는 전진(前進) 식당에 들어가 일했습니다. 집이 가난했으니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습니다. 식당 일은 중노동이었습니다. 매일 새벽 3시를 전후해 기상해 장작을 패고 불을 지폈으며 석탄재를 치웠습니다. 그리고 밀가루를 반죽하고 만두소를 만드는 일상의 반복이었습니다. 당시 주방장은 그를 이렇게 기억합니다. "그 힘든 일을 하면서도 단 한 번도 욕을 하거나 피곤하다고 하거나 불평을 하지 않았습니다. 참 기이하고 뭔가 다른 아이라고 생각했지요." 교과서적인 얘기지만 잘될 녀석은 싹수부터 달랐던 모양입니다.
 
문혁이 끝나고 1978년 대학입시가 부활합니다. 그는 화둥(華東) 지역에 있는 대학 중 법학과가 있는 7개 대학에 모두 원서를 냈지요. 꼭 법대에 진학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그는 훗날 이렇게 회고합니다. "법률은 공정을 추구한다. 권선징악의 학문이다. 법관은 선량해야 하며 약한 민중들을 지탱하는 보루이기 때문이다."
검찰 간부들에게 훈시하는 차오 [사진 봉황망]

검찰 간부들에게 훈시하는 차오 [사진 봉황망]

1979년 그는 화둥 정법 학원 법학과에 입학합니다. 대학 생활은 '공부벌레' 이상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일 년 내내 새벽 4시에 일어나 조깅을 하고 공부를 했습니다. 졸업할 때까지 이 같은 그의 일상은 흐트러짐이 없었습니다. 힘들지 않냐고 친구들이 묻자 그는 "식당에서 일할 땐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났는데 (한 시간 늦게 일어나는데) 얼마나 행복하냐"고 되물었다고 합니다. 최악의 경험을 현실의 기준으로 삼아 역경을 이겼다고 할 수 있지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부한 결과는 두 개의 '기록'으로 보답합니다. 하나는 법대에서 법학 대학원에 입학하면서 학생들은 40여 개 과목을 수강하는데 올 A 학점을 받은 유일한 학생이 그였고, 다른 하나는 4년 내내 상하이시 우수 학생에 선발됐다는 겁니다. 어쨌든 그는 공부가 좋았다고 합니다.  
 
1986년 법학 대학원을 졸업한 그는 학교에 남아 교수가 됩니다. 당시는 해외 유학 붐이 한창이었습니다. 화둥대 법대에서도 대학원 생 3명 중 2명이 해외 유학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차오는 학교에 남아 후배 양성의 길을 택합니다. 저우훙쥔(周洪均) 당시 화둥 정법대 국제학원 교수는 "그는 시종일관 목표가 명확했다. 자신의 꿈을 국내에 뒀다"고 회고합니다. 차오는 자신의 글을 통해 "나는 교수란 조국과 인민에 대해 딴 마음을 품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당연히 중국의 개혁과 발전, 그리고 중화민족의 번영과 부흥을 위해 자신의 모든 재능과 지혜를 쏟아야 한다. 입으로만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된다. 나는 언제 어디서든 이런 시험을 겪고 있다"며 유학 안 간 심경을 밝힙니다. 한 마디로 '골수 민족주의자'라 할 수 있습니다.
화둥정법학원 전경 [사진 바이두 백과]

화둥정법학원 전경 [사진 바이두 백과]

차오는 대학원생 시절 법학적 시각에서 개혁개방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는 자신의 모든 지식을 동원해 법학과 개혁개방의 접합점을 찾으려고 고민했지요. 부작용이 없으면서 가성비가 큰 개혁개방 방안을 찾으려고 했던 겁니다.
 
예컨대 이런 식이었습니다. 1986년, 중국에는 외국과의 합자기업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는 몇몇 대학원생들과 함께 휴가를 내 합자기업을 상대로 조사를 했습니다. 관심은 합자 기업의 선택과 역할, 원자재 공급 현황, 해외 수출 상품의 핵심 가치와 (중국 상품) 자주권 등 문제 등이었습니다. 조사 내용을 정리한 후 그는 법학적 관점에서 이를 분석합니다. 그리고 여러 편의 관련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논문 중 하나에서 이런 혁명적 주장을 합니다. "우리나라는 장기간 토지에 대한 무한 무상 사용 정책을 견지했다. 우리 헌법이 토지의 임대를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토지를 유상으로 임대하게 한다면 외국 자본을 도시 기반 시설 건설에 투입할 수 있다."
 
그의 주장은 중국을 발칵 뒤집어 놓습니다. 연일 언론이 그의 발언을 보도했고 일부에서는 그가 반(反)마르크스 주의, 반사회주의자라고 공격했지요. 심지어 일부 인사는 "차오의 주장은 중국의 국토에 대한 조차(租借)를 허용하자는 것"이라며 비난의 강도를 더했습니다. 비난이 거세지자 차오는 "토지 임대 수입은 국가 발전과 창조 등 더 큰 이익을 창출하자는 것이지 결코 국토를 팔아먹자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는 내용을 논문에 삽입합니다.
 
그래도 논란은 수그러들지 않았습니다. 결국 상하이 시 관련 부서에서 논문에 대한 조사에 착수합니다. 그리고 그의 논문은 논리나 현실적 측면에서 신뢰성과 중대한 의미가 있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이어 논문은 당 중앙에 보고됩니다. 공산당과 국무원 역시 그의 논문에 대해 수차례 검증 작업을 한 후, '의미 있는 논문'이라고 평가합니다. 이후 언론이 나섭니다. 1987년 9월 당 기관지 광명일보와 해방일보, 홍콩의 친중국 성향의 문회보, 대만과 싱가포르의 화교 언론이 차오의 토지 유상 임대론에 대해 대대적으로 보도합니다. 물론 긍정적 평가와 함께입니다.  
 
1988년 4월 전인대(국회격) 1차 회의는 헌법 개정안을 내고 토지 임대 금지 조항을 삭제합니다. 그리고 "토지 사용권은 법률에 따라 이양할 수 있다"는 새로운 규정을 삽입하지요. 이후 중국의 개혁개방은 탄력을 받습니다. 도시마다 외자가 들어오고 부동산 개발 붐이 일면서 도시 인프라 건설이 탄력을 받았습니다. 한 법학도의 창의적 제안이 헌법을 바꾸고 개혁개방을 본 궤도에 오르게 한 추동력이 된 겁니다.  이때부터 중국 권력은 차오를 주목하기 시작합니다.
모범 검찰 공무원을 격려하는 차오 [사진 공산당 신문망]

모범 검찰 공무원을 격려하는 차오 [사진 공산당 신문망]

1994년 화둥 정법학원 국제법 학과 부주임이던 그는 중난하이(中南海·중국 최고 지도자들의 사무실과 거처가 있는 지역)의 부름을 받습니다. 장쩌민 당시 국가 주석 등 최고 지도자들이 그에게 국제법 강의를 요청한 겁니다. 강의 주제는 '국제 상업무역 법률 제도와 무역 관세 총 협정'이었습니다. 개혁개방으로 외자가 들어오고 무역이 급증하는데 국가 경영은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했던 겁니다.  그는 1998년 5월에도 최고 지도자들에게 '금융안전과 법률 건설'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하는 등 국가 지도부에 대한 국제법 강의를 도맡아 합니다. 훗날 장 전 주석 등 당 지도부는 그의 강의가 국제적 시야를 넓이는 계기가 됐다는 평가를 했다고 합니다.  
 
중국 법학자로서 그의 위상은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특히 국제경제법 영역의 학술적 조예가 남다릅니다. 그는 지금까지  『국제경제법개론』, 『국제경제법 신평 집』, 『관세와 무역 총협정』 등 국제법 교재만 20여 권, 논문은 230여 편을 내놓았습니다.   그의 저서 『국제상품 책임 개론』은 중국 최초로 상품의 법적 책임에 대한 전문 서적입니다. 그가 주도해 편집한 『국제경제법 신평 집』은 150만 자에 이를 정도로 방대한데, 1986~1994년 상하이 시의 철학 사회과학 부문의 가장 위대한 서적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동시에 국정교과서 위원회로부터 '최고 학술저서상'을 받기도 했지요.
2008년 차오가 검찰장에 임명되는 순간 박수치는 당 간부들 [사진 신화망]

2008년 차오가 검찰장에 임명되는 순간 박수치는 당 간부들 [사진 신화망]

그의 위대한 학술적 성취는 수많은 영예를 안기기도 했습니다. 국가급 청년 법률 전문가, 중국 10대 위대한 청년, 상하이 10대 대학 엘리트, 상하이 10대 위대한 청년, 중국 10대 청년 법학자 등. 1992년에는 국무원(행정부) 특수 장학금 수혜, 1997년에는 국가 백천만 인재 프로젝트에 선정, 2001년에는 벨기에 겐트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까지 받습니다. 그리고 2010년 11월엔 중국이 주도해 만든 국제기구, '국제 반부패국 연합' 주석에 올라 2년 동안 반부패에 대한 경륜도 쌓습니다.
 
1999년은 그의 인생 역정이 학술에서 권력으로 확장된 해였습니다. 사법 부문에 참신한 개혁 인물을 찾던 장쩌민 당시 주석이 화둥 정법학원 총장이던 그를 최고 인민법원(대법원) 부원장으로 발탁한 겁니다. 후진타오 주석은 한수 더 떠 2008년 그를 검찰의 최고 수장인 최고 인민검찰원 검찰장에 올리며 검찰 개혁을 맡기지요. 검찰장 취임식에서 그는 "죽어도 당과 동료, 그리고 국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다"고 맹세합니다. 그러나 후진타오 집권 후반기(2007~2012년) 그의 검찰 개혁은 부패로 낙마한 저우룽캉(周永康) 전 정법위 서기의 위세에 눌려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리고 시진핑 주석 시대에 들어와 그의 부패 척결은 힘을 받습니다.
저장성 검찰청을 방문해 현장을 살피는 차오 검찰장(중앙) [사진 공산당 신문망]

저장성 검찰청을 방문해 현장을 살피는 차오 검찰장(중앙) [사진 공산당 신문망]

현재 당 중앙위원인 그는 지난 8월 차기 정치국 위원 후보 35명을 상대로 한 예비경선에서 높은 득표를 보이며 차기 정치국원(25명) 입성할 것으로 예상됐습니다. 특정 파벌에 속하지 않는 그가 영도자 반열이라는 정치국원에 올랐다면 그 이유는 전술한 대로 청렴성과 전문성, 그리고 창의성 덕일 겁니다. 여기에 '토지 임대'라는 창의적 아이디어로 중국 사회의 비약적 발전에 기여한 그의 예지와 독창성, 그리고 개혁 의지를 눈여겨 본 시진핑의 의지가 더해진 거겠지요.  
 
그의 트레이드마크(trademark)는 미소와 겸손입니다. 그를 한 번이라도 만나봤다면, 그와 장시간 교류를 했다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입니다.  그가 화둥 정법학원 교수 시절 그를 아는 한 친구는 현지 언론에 이렇게 그를 평합니다. "천성이 온화하고 항상 웃는다. 그리고 매사에 전문적이다." 그는 한 마디 더합니다. "그가 실력이 있는 건 분명하다. 그러나 그 실력 위에 미소와 겸손이 있다고 난 생각한다."
 
차이나랩 최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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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규 최형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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