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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워치] 1980년 광주 물줄기 바꾼 미 ‘체로키 작전’

중앙일보 2017.10.13 02:03
스테판 해거드 샌디에이고 캘리포니아대(UCSD) 석좌교수

스테판 해거드 샌디에이고 캘리포니아대(UCSD) 석좌교수

나는 한반도 문제를 다루는 대학원생 강의를 매년 개설한다. 광주가 한 주일 분량이다. 최근 영화 ‘택시운전사’의 흥행 성공, 1980년 광주에 대한 문재인 대통령의 열렬한 관심, 5·18 광주민주화운동 특별조사위원회의 출범에 즈음해 이 사건에 대한 미국 쪽 시각을 다시금 살펴보게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 다음 달인 1979년 11월, 지미 카터 미 대통령은 한국 상황을 분석하기 위해 ‘체로키 작전(Operation Cherokee)’이라는 그룹을 결성했다. 광주의 비극은 이란 수도 테헤란 주재 미 대사관이 점거된 다음에 일어났다. 이란 상황은 한국 상황에도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주한 미 대사관의 보고서를 포함해 ‘체로키 작전’이 만들어낸 문헌의 비밀이 해제돼 당시 그런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 나는 ‘체로키 작전’ 문건을 수강생들에게 읽힌 뒤 “미국은 다르게 대응해야 했는가” 하는 간단한 질문을 던진다. 흥미롭게도 전두환의 1979년 12월 군부 쿠데타에서부터 80년 광주로 이어지는 상황에 대해 매년 강의 때마다 학생들 의견 대립이 심하다.
 
안개 같은 불확실성에 휩싸인 인물들을 쉽사리 비난하면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80년 5월의 미 당국자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정보가 부족했다. 한국 당국이나 미 대사관을 통해 얻는 정보가 왜곡되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글로벌 워치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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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강생 일부는 미국이 광주 상황을 면밀히 주시하기만 하고 전면에 나서지 않은 것이 옳았다고 주장한다. 제시하는 근거는 다양하다. 이란 및 북한 상황을 포함하는 미국의 전략적 이해, 타국 내정 불간섭 원칙 등이다.
 
하지만 미국·한국인 등을 포함한 수강생 절반쯤은 미국의 ‘소심함’에 실망감을 표한다. 이런 학생들에게 나는 “미국에 한국 계엄군의 광주 투입을 저지할 법적 권한이 없었다”는 기술적인 사실을 일깨워준다. 미국이 계엄군의 광주 투입을 저지하지 않았다고 비판하는 것은 잘못됐다. 미국이 저지를 시도해도 전두환 장군이 이를 무시했다면 그 다음에 무슨 일을 할 수 있었을까. 이런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은 없다.
 
다만 미국이 직면한 문제는 기술적이라기보다 정치적이었다. 미국은 어느 시점에서 미국의 우려를 한국 군부에 강력하게 표명해야 했을까. 이 문제에 대해 ‘체로키 작전’의 내부 토론은 꽤 서둘러 결론을 내렸다. 미국이 한국 내 법과 질서 확립의 필요성에 공감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결론은 이란 상황을 한국에 잘못 적용한 때문이라고 본다.
 
반미 사회세력을 이란에서처럼 한국에서도 대면하는 건 미국 입장에선 악몽이었다. 하지만 이란과 한국 상황을 조금만 더 면밀히 비교했다면 상황이 전혀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란과 달리 한국의 야당 세력과 학생 시위는 미국의 이익을 결코 위협하지 않았다. 80년 한국에서 벌어진 민주화 운동을 훗날 반미로 치닫게 만든 건 미국 자신이었다. 미국이 한국에서 이란처럼 무질서를 목격한 건 맞다. 하지만 이란 주재 미 대사관 점거와 광주의 차이점을 인식하지 못한 건 미국의 큰 실수였다.
 
미국의 또 다른 우려는 북한이 한국 상황을 악용할 가능성이었다. 하지만 당시 북한군의 의미있는 움직임이 있었다는 근거는 희박하다. 최근 드러난 문건에 따르면 북한은 광주에서 벌어진 일들을 보고 ‘놀라움’을 표했다. 북한이 광주의 배후로 작용하지 않았다는 근거일 수 있다.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된 이후 미국의 대응은 미온적이었다. 주한 미 대사는 중재에 나서 달라는 한국 측 요청을 거부했다. 계엄군이 광주에 진주하자 카터 대통령은 공식적으로 “어떤 때에는 인권이 안보에 종속돼야 한다”고 말했다. ‘체로키 작전’ 그룹은 전두환의 집권을 용인하고 새로운 권위주의 정권에 주변적인 정도의 영향력을 미치는 길을 택했다.
 
미국은 다르게 대응할 수 있었을까.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서는 1986~87년에 벌어진 일들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보수파 대통령인 로널드 레이건은 전임자보다 훨씬 적극적인 정책을 구사했다. 그는 자유롭고 공정한 대통령 직선을 지지했다.
 
어쨌든 곤혹스러운 역사로 인해 여태껏 한국 사회가 분열됐다. 한국이 분열을 극복하고 화합하길 희구한다. 한국이 80년에 민주화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때 민주화됐다면 한국은 7년 동안 민주화 운동 과정의 인명 희생을 피할 수 있었다. 사실에 기반한 성찰은 한국뿐 아니라 미국에도 절실하다.
 
스테판 해거드 샌디에이고 캘리포니아대(UCSD) 석좌교수
 
◆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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