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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 100년도 더 된 시장통, 젊은이가 왜 이리 많이 와?

중앙일보 2017.10.13 01:00
시장에서 놀자 ① 1913송정역시장
전통시장을 소개하는 기획 ‘시장에서 놀자’를 시작합니다. 재미난 이야기와 맛난 먹거리, 톡톡 튀는 아이디어를 자랑하는 시장을 소개합니다. 첫 번째는 광주 1913송정역시장입니다.
  
‘엎어지면 코 닿을 곳’이란 말은 이 시장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기차를 타고 광주송정역에서 내려 횡단보도만 건너면 1913송정역시장이 나온다. 시장 이름에 붙은 숫자는 의미가 깊다. 1913년은 호남선 열차가 개통한 해다. 이때 송정리역이 생겼고, 역 바로 앞에 장이 섰다. 한참 동안 ‘송정역전매일시장’이란 이름을 달고 살았다. 새 이름을 얻은 건 2016년 4월이다. 2015년부터 광주시와 중소기업청(현 중소기업벤처부), 그리고 현대카드가 전통시장 현대화 사업의 일환으로 지원에 나서면서다. 이름만 바꾼 게 아니라 주변 도로를 정비하고 가게 간판을 전부 바꿨다. 전신주를 걷어내고 전선은 땅에 묻었다. 100년 된 낡은 시장의 때깔이 완전히 바뀌었다.
 
상인 중 청년이 80%, 평균연령 47세
 
KTX와 SRT 열차가 지나는 광주송정역 바로 앞에 있는 1913송정역시장. 커다란 아날로그 시계와 노란색 조명이 어우러진 시장의 밤 분위기가 낭만적이다.

KTX와 SRT 열차가 지나는 광주송정역 바로 앞에 있는 1913송정역시장. 커다란 아날로그 시계와 노란색 조명이 어우러진 시장의 밤 분위기가 낭만적이다.

더 중요한 변화는 화장만 고친 게 아니라 새 피를 수혈했다는 사실. 현대카드는 디자인 작업과 함께 창업 컨설팅에 나섰고, 중기청은 청년상인에게 월세를 지원했다. 순식간에 시장이 젊어졌다. 상인 평균연령이 63세에서 47세로 낮아졌고, 현재 60여 점포 중 80%를 청년상인이 운영하고 있다. 개미네방앗간을 운영하는 김인섭(58) 상인회장은 “2015년만 해도 시장에는 빈 점포가 수두룩했고, 하루 방문객이 평균 200명에 불과했다”며 “지금은 방문객이 주중 1000명, 주말 2000명에 달하고 기존 상인도 매출이 2년 전보다 3배 이상 늘었다”고 말했다.
 
시장 초입에 있는 디자인숍 역서사소는 전라도 사투리를 응용한 디자인 제품을 판다.

시장 초입에 있는 디자인숍 역서사소는 전라도 사투리를 응용한 디자인 제품을 판다.

시장 입구로 들어서면 낯익은 시골 장터 풍경이 펼쳐진다. 오래된 국밥집과 채소가게, 정육점, 그리고 홍어 전문점이 반겨 준다. 조금 더 걸어가면 좌측에 알록달록한 노란색 간판을 단 가게 ‘역서사소’가 눈에 띈다. 전라도 사투리로 ‘여기서 사시오’라는 뜻의 디자인숍이다. 조선대 시각디자인과 동문인 김효미(36)·김진아(35)씨가 디자인회사를 하다가 사업을 확장했다. 냉동창고로 쓰던 건물 1층을 디자인숍, 2층을 작업실로 쓴다. 가게에는 재미난 디자인 제품이 많다. ‘아따’ ‘긍께’ 같은 사투리를 새긴 모자와 노트, 달력 등을 판다.
 
시장에는 아이디어가 번뜩이는 맛집도 많다. 오전부터 사람들이 줄 서는 ‘또아식빵’도 그중 하나다. 국산 밀로 만든 9종의 식빵이 맛있다. 1913송정역시장에서 출발해 현재 전국에 30개 가맹점을 거느리고 있다. 20m쯤 더 안으로 들어가면 분식집 ‘계란밥’이 나온다. 박강근(30) 사장의 창업 사연이 흥미롭다. 군 시절 행군을 하다가 김밥이 아닌 계란밥을 만들어 먹으면 훨씬 든든하지 않을까 생각했단다. 그리고 한 해 매출 3억원에 달하는 알짜 식당을 일궜다. 시장의 최연소 사장인 ‘미미베이글’ 이은지(27) 사장은 떡집을 운영하는 부모로부터 노하우를 물려받아 식감이 쫀득한 베이글을 개발했다.
 
매출 2년 새 3배 늘고 주말 2000명 방문
 
서울떡방앗간은 국내에서도 드물게 자연건조 국수를 만드는 집이다. 기온이 높은 여름철에만 국수를 말린다.

서울떡방앗간은 국내에서도 드물게 자연건조 국수를 만드는 집이다. 기온이 높은 여름철에만 국수를 말린다.

시장과 함께 오랜 세월을 함께 버틴 가게도 많다. 방앗간, 제분소처럼 숙련된 손놀림이 필요한 가게가 그렇다. 서울떡방앗간은 국내에서도 드문 자연건조 국수를 만드는 집이다. 박미순(48) 사장은 “향수를 자극하는 음식을 찾는 사람이 여전히 많다”며 “맛뿐 아니라 제품 포장까지도 예스럽게 만드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김정애(66) 매일제분소 사장은 “늙은이들은 물러날 때가 얼마 안 남았다”면서도 “시장에 사람이 북적북적하니 일할 맛이 난다”며 힘차게 떡을 빚었다.
 
전북 고창에서 재배한 보리로 수제맥주를 만드는 밀밭양조장. 대낮부터 술잔을 기울이는 사람이 많다.

전북 고창에서 재배한 보리로 수제맥주를 만드는 밀밭양조장. 대낮부터 술잔을 기울이는 사람이 많다.

어스름한 저녁이면 제법 분위기 있는 조명이 켜지고 시장에 활기가 돈다. 퇴근길, 한잔 기울이려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이면서 시장이 낮보다 더 북적인다. 옛 새마을금고 자리에 들어선 ‘밀밭양조장’은 잔 부딪치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전북 고창 보리로 만든 에일맥주가 주종인데, 홉 향과 과일 맛이 은은하다. 책을 읽으면서 맥주를 마시는 서점 ‘인생가게’도 있다. 전남 담양에서 만든 밤블리 맥주를 판다. 점원 말에 따르면 기차에서 읽을 책을 사가는 이가 많단다.
 
시장은 170m 남짓한 직선 골목이 전부다. 그런데도 반나절 놀이터로 부족함이 없다. 기차역이 워낙 가까워 제2의 대합실로 불리기도 한다. 한데 밤 기차를 타는 사람은 조심해야 할 것 같다. 아늑한 조명과 분위기에 취해 시장에 눌러앉고 싶어질지 모르니까.  
 
광주송정역

광주송정역

<글 싣는 순서>
② 정선 아리랑시장
③ 파주 문산자유시장
④ 포항 죽도시장
 
광주=글·사진 최승표 기자 spcho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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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표 최승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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