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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택의 글로벌 줌업] ‘저항의 아이콘’ 체 게바라 50주기 … 혁명은 가고 이미지로 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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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chae.intaek@joongang.co.kr

[채인택의 글로벌 줌업] ‘저항의 아이콘’ 체 게바라 50주기 … 혁명은 가고 이미지로 남다

중앙일보 2017.10.11 01:00
체 게바라의 50주기를 맞아 아일랜드에서 발행한 기념우표. 사진을 바탕으로 아일랜드 출신 미술가 짐 피츠패트릭이 제작한 팝아트 작품을 담았다. [EPA=연합뉴스]

체 게바라의 50주기를 맞아 아일랜드에서 발행한 기념우표. 사진을 바탕으로 아일랜드 출신 미술가 짐 피츠패트릭이 제작한 팝아트 작품을 담았다. [EPA=연합뉴스]

지난 9일은 ‘남미 혁명가’ 체 게바라(1928~67)의 50주기였다. 게바라는 67년 남미 볼리비아의 산중에서 게릴라전을 벌이다 10월 8일 포로로 잡혀 이튿날 총살당했다. 39세였다. 게바라는 56년 피델 카스트로 등과 함께 쿠바에서 게릴라전을 시작해 58년 12월 풀헨시오 바티스타 장군의 군사정권을 무너뜨리고 아메리카 대륙의 첫 공산정권 수립에 기여했다. 하지만 그는 쿠바를 떠나 아프리카 콩고를 거쳐 볼리비아에서 최후를 맞았다. 현지에 비밀리에 묻혔던 그의 시신은 97년 발견돼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서 300㎞ 떨어진 산타클라라로 옮겨졌다. 외신에 따르면 산타클라라의 게바라 무덤에는 50주기를 맞아 참배객이 몰리고 있다.
 
게바라는 스타 혁명가다. 전 세계의 수많은 젊은이가 세상을 떠난 지 반세기가 된 인물을, 그것도 대중문화 스타도 아닌 ‘혁명가’에게 열광한다. 행사장이나 모임 현장에 게바라의 형상을 담은 깃발을 들고 나오는 일이 다반사다. 심지어 일상에서도 자연스럽게 그의 사진이나 이미지를 새긴 티셔츠를 입고 다닌다. 이렇게 게바라는 대안문화·저항문화는 물론 청년문화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게바라는 20세기 이미지 정치의 상징이기도 하다. 좌파는 물론 심지어 극우파도 시위 현장에서 그의 이미지를 빌려 쓴다. 좌우나 보수·진보를 넘어 세상의 모든 기존 체제와 권위에 저항했다는 인상 때문일 것이다. 그의 삶을 추적해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배경을 살펴보자.
 
28년 6월 14일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난 게바라는 특이하게도 중산층 가정 출신의 의사였다. 그가 혁명가가 된 계기는 여행이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대 의대생이던 그는 50년·51년·53년 세 차례의 여행으로 아메리카 대륙의 구석구석을 두 눈으로 살펴봤다. 농부와 광부의 비참한 삶에 분노한 게바라는 혁명으로 정치체제를 바꾸지 않으면 라틴아메리카의 가난과 사회적 모순을 개혁할 수 없다고 확신하게 됐다. 의사 게바라는 혁명가로 변신했다.
 
55년 멕시코 종합병원에서 일하던 그는 현지에 망명 중이던 쿠바 혁명가 피델 카스트로를 만났다. 이들은 56년 11월 쿠바로 잠입해 무장 게릴라 활동에 들어갔다. 공산정권이 들어서고 ‘혁명 영웅’이 된 게바라는 쿠바 중앙은행 총재와 산업장관 등 고위직을 맡았지만 권력에 취하지 않았다. 오히려 입바른 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특히 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를 겪으면서 소련에도 분노했다. 당시 친소련 정책을 펴던 쿠바 지도자 카스트로는 미국 턱밑에 자리 잡은 자국에 소련 핵미사일 기지 건설까지 허용했다. 전 세계가 핵전쟁에 가장 가까이 다가선 순간이었다. 실망한 게바라는 65년 1월 알제리 방문길에 소련을 “제국주의적 착취의 공범”이라고 비난했다. 소련 원조가 끊길 위기에 처하자 게바라는 공직에서 물러났고 볼리비아에서 최후를 맞았다.
 
사실 게바라는 카키색 군복에 베레모, 그리고 긴 머리와 수염으로 상징된다. 호소하는 듯 깊은 눈동자가 예수의 이미지를 떠오르게 한다는 사람도 많다. 거기에 또렷한 이목구비 등 수려한 외모가 더해져 세대를 넘어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모으는 스타 혁명가가 됐다는 지적도 있다. 그가 추구한 정치적 이상보다 이미지에 열광하는 사람이 더 많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하지만 과연 외모만으로 그렇게 오랫동안, 그 숱한 사람이 게바라에게 열광했을까? 그는 열정적으로 무장투쟁을 벌였지만 지적이고 합리적인 인물이었다. 게바라는 무장투쟁 과정에서 격렬한 토론을 거쳐 ‘포로는 죽이지 않는다’는 원칙을 관철시켰다. 이는 게릴라에 대한 주민들의 지지를 불렀다. 의대 시절 중남미 여행에서도 분노에만 그치지 않았다. 그는 여행 도중 페루 아마존 강변의 산파블로 나환자 요양소에서 몇 주간 자원봉사를 했다. 그 과정에서 서로 상대를 위하는 나환자들을 목격하고는 “이렇게 외롭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가장 고귀한 형태의 연대감과 충성심이 솟아나다니”라며 감탄했다. 그가 인간적인 혁명가로 평가받는 이유다.
 
게바라의 삶을 살펴보면 자신의 ‘외형률’에만 치중하는 이미지 혁명가가 아니라 깊은 자기 성찰로 자신만의 ‘내재율’을 확보한 내공 있는 인간이라는 느낌이 든다. 자신이 참가한 혁명을 비현실적인 낭만극으로 미화하지도, 피비린내 나는 막장 잔혹극으로 끌고 가지도 않았다. 대신 자신만의 ‘인간적’ 가치관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모터사이클을 타고 주민들의 삶을 직접 돌아보고 함께 울며 분노하면서 신념을 다졌기에 그의 철학은 굳고 강하다. 문제의 해답을 현장에서 찾으려 했다는 점도 있다. 책으로 민중을 배운 책상머리 혁명가와 다른 점이다. 그는 의사라는 직업을 버리고 혁명에 뛰어들었다. 혁명을 호구지책으로 여기고 그 이익을 탐하는 직업혁명가와 다른 점이다. 그래서 그는 권력을 차지하고도 중심이 명확했다. 사익을 위해 신념을 버리지 않고, 신념을 위해 자신을 버렸다. 이상을 실현하려면 구호나 이미지가 아니라 행동과 희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소련과 쿠바 혁명의 동지들이 그를 멀리했던 이유가 바로 이런 게 아니었을까. 권력자가 되면 본질적으로 혁명가를 멀리하려고 드니까 말이다. 게바라는 그렇게 자신의 원칙과 신념에 따라 말하고 행동했으며, 죽음을 불사하고 자신의 신념을 지켰다.
 
게바라는 자신이 살았던 50~60년대 냉전 상황이 만든 시대의 산물이다. 문제는 그 상황 중 일부가 지금도 달라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소련이 무너지고 쿠바가 가난에 시달려도 게바라에게 열광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50주기에 다시 한번 생각하는 게바라의 삶이다.
 
체 게바라는 어떻게 살았나
1928년 6월 14일 아르헨티나 중산층 가정 서 출생
1948년 부에노스아이레스대 의대 입학
1950년 개조 자전거로 아르헨티나 북부 여행(약 4500㎞)/가난한 사람 돕는 봉사를 결심
1951년 모터사이클과 항공 편으로 중남미와 미국 여행(약 9000㎞)/ 사회 개혁 결심
1953년 6월 의과대학 졸업하고 의사가 됨
7월 중남미 여행 중 과테말라에서 친미 쿠데타 목격/ 혁명에 뛰어들기로 결심
1955년 멕시코에서 쿠바 혁명가 카스트로 접촉
1956년 11월 쿠바 잠입해 무장 게릴라 활동 시작
1958년 12월 바티스타 정권 전복, 공산정권 수립
1959년 중앙은행 총재, 산업장관 등 요직 맡음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1965년 1월 소련을 “제국주의적 착취의 공범”
4월 모든 공직에서 추방
1967년 10월 9일 볼리비아에서 처형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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