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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만의 인간혁명]지식붕괴의 시대, 세종의 공부법이 뜬다
윤석만 기자 사진
윤석만 중앙일보 팀장 sam@joongang.co.kr

[윤석만의 인간혁명]지식붕괴의 시대, 세종의 공부법이 뜬다

중앙일보 2017.10.09 00:00
2011년 방영한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는 세종의 훈민정음 반포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을 그렸다. [SBS]

2011년 방영한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는 세종의 훈민정음 반포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을 그렸다. [SBS]

한글을 세종이 혼자 만들었다고요? 오늘은 한글이 반포(1446년)된 지 571주년을 맞는 날입니다. 온 국민이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문화유산이며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문자”(미국 작가 펄 벅)로 불리지만 정작 우리는 한글에 대해 모르는 게 많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집현전 학자들이 한글을 만들었다는 통념입니다. 그러나 역사의 많은 증거들은 한글을 만든 이는 집현전 학자들이 아니라 세종 개인이었다는 가설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세종실록의 1443년 12월30일자 기록엔 “임금께서 친히 언문 28자를 지으셨다”고 표현돼 있습니다. 그 전엔 한글에 대한 어떤 기록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만일 나라의 공식기관인 집현전 학자들이 주도해 한글을 만들었다면 창제 과정이 실록에 소상히 적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유사 이래 처음으로 우리만의 독창적인 문자를 만드는 일인데 아무런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는 건 매우 의아한 일입니다. 더욱이 임금의 사소한 언행까지 실록에 남겼던 당시의 사관을 보더라도 이해하기 힘든 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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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이야기는 곧 세종이 한글을 비밀리에 만들었다고 추론할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실제로 당시 상황을 보면 조선의 지식인들은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가 뿌리 깊었습니다. 훈민정음 반포를 가장 격렬하게 반대했던 이는 집현전의 실세였던 부제학 최만리였습니다. 그는 신석조, 정창손, 하위지 등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상소를 올려 훈민정음 반포를 반대했습니다.  
 
 “이번 언문은 새롭고 기이한 재주에 지나지 않습니다. 학문에 방해되고 정치에도 유익함이 없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옳은 점이 없습니다. 어찌 예부터 써오던 폐해 없는 글자를 고쳐, 따로 낮고 천하며 속된 말인 글자를 새로 만들어 쓰겠습니까?”(최만리의 상소문 일부)
 
 이처럼 부정적 여론이 심각한 상황에서 새로운 글자를 만드는 일을 집현전에 맡겼더라면 최만리와 같은 학자들의 반대에 부딪혀 시작도 못해보고 끝났을 겁니다. 또 한글 창제는 한자 문화권을 벗어나려는 움직임으로 비쳐 명나라와의 외교 문제로 비화될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에 국가적 사업으로 추진하기 어려운 면도 있었죠.
훈민정음 해례본. [중앙포토]

훈민정음 해례본. [중앙포토]

  이런 이유로 세종은 그가 가장 아꼈던 집현전 학자들조차 모르게 비밀리에 한글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창제 과정에서 아들인 문종과 딸인 정의공주 등이 참여했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실제로 훈민정음 해례본에는 “왕과 왕자가 즐겁게 일을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기도 합니다. 또 정의공주가 시집간 죽산 안씨의 대동보(大同譜·같은 본관을 지닌 성씨의 모든 파를 엮은 족보)에도 공주가 한글 창제에 참여한 기록이 있다고 하죠.
 
 이처럼 우리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인 한글은 세종 개인의 치밀한 준비와 노력이 없었다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겁니다. 이런 업적 때문인지 만원권 지폐에 그려진 세종의 옷깃에는 한글 자모가 조그맣게 쓰여 있기도 합니다. 물론 위조 방지라는 실용적 목적도 있긴 하지만요.  
한국은행이 발행한 만원권 지폐를 자세히 살펴보면 세종대왕의 옷깃에 한글 자모가 쓰여 있다. [윤석만 기자]

한국은행이 발행한 만원권 지폐를 자세히 살펴보면 세종대왕의 옷깃에 한글 자모가 쓰여 있다. [윤석만 기자]

 그렇다면 세종은 어떻게 세계 최고의 과학적 문자를 개인이 만들 만큼 뛰어난 창의성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역대 임금 중 유일하게 '성인(聖人·saint)'이란 뜻의 ‘성군(聖君)’으로 추앙받는 세종은 어질고 인자한 것도 모자라 똑똑하기까지 했습니다. 세계인들도 그를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비견하며 세종의 놀라운 업적을 기리고 있죠. 그의 천재성은 과연 타고난 것일까요.
 
 많은 역사가들은 그의 창의성이 학습을 통해 길러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역사상 가장 뛰어난 임금일 수 있던 건 ‘공부하는 임금’이었기 때문이라는 거죠. 임금과 신하가 함께 공부하는 ‘경연’ 횟수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선대인 태종 때는 재위 기간 18년 동안 60여 회에 불과했지만 세종은 32년간 1898회나 진행했습니다. 세종은 성리학 뿐 아니라 천문, 지리, 역법에도 통달해 집현전 학사들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그가 이처럼 공부하는 습관을 몸에 밸 수 있던 건 왕이 되기까지의 독특한 경험 때문입니다. 1418년 8월 태종의 뒤를 이어 조선의 4대 임금으로 즉위했지만 원래 그는 왕세자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왕세자로 책봉된 건 불과 두 달 전인 6월의 일이었죠. 보통 십수년씩 세자로서 왕위 수업을 받는 조선시대의 다른 왕들과 비교하면 이례적인 일입니다.
2011년 방영한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에서 배우 송중기가 세종의 젊은 시절인 충녕대군을 연기했다. [SBS]

2011년 방영한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에서 배우 송중기가 세종의 젊은 시절인 충녕대군을 연기했다. [SBS]

 원래 세종(충녕대군)에겐 위로 두 형이 있었습니다. 첫째인 양녕은 일찌감치 세자에 책봉됐습니다. 그러나 어린 세자를 등에 업은 외척들의 위세를 곱게 보지 않은 태종은 세자의 외삼촌, 즉 자신의 처남들을 일찌감치 제거합니다. 이를 본 세자는 큰 충격을 받고 방탕한 길로 빠져듭니다. 둘째인 효령은 불교에 심취해 승려들과 어울리기 일쑤였습니다. 결국 태종은 양녕을 폐한 뒤 충녕을 세자로 책봉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왕위를 이양합니다. 이 때 충녕의 나이 21세였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30~40대의 완전한 성년의 나이인 셈이죠.
 
 그 때까지 충녕은 무엇을 했을까요? 자신이 6살 때 세자로 책봉된 큰 형이 있었기에 일찌감치 왕권에 대한 욕심을 버려야 했습니다. 특히 태종이 왕권을 얻기 위해 무자비한 살육을 벌였던 것을 익히 잘 알고 있었기에 섣부른 야망을 품기 힘들었습니다. 그 때문인지 둘째 형인 효령도 권력과는 거리가 먼 종교 활동에 매진했죠. 충녕이 할 수 있는 건 학문에 힘을 쏟는 일이었습니다. 성인이 될 때까지 권력 관계에서 오는 중압감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고 오직 공부에 충실할 수 있었습니다.  
 
 충녕이 학문에 심취할 수 있던 또 하나의 이유는 그가 갖고 있는 특유의 기질 때문입니다. 어릴 적부터 유난히 호기심이 많았고 탐구 정신이 강했죠. 유학의 경전인 사서삼경을 비롯해 농업, 과학 등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고루 읽었습니다. 질문이 많아 스승을 귀찮게 하는 경우도 다반사였습니다. 임금이 된 후에도 마찬가지였죠. 왕위 수업을 전혀 받지 못한 채 임금에 올랐기 때문에 늘 신하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궁금한 것은 찾아보고 물어보며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세종대왕은 집현전을 설치해 인재를 양성했다.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세종대왕은 집현전을 설치해 인재를 양성했다.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이 같은 ‘세종의 공부법’을 요약하면 ‘질문하고 토론하라’입니다. 1만 8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세종실록’에서 임금의 표현 중 가장 많이 나오는 말 중 하나는 “경들은 어찌 생각하시오”입니다. 질문을 던져 상대방의 생각을 이끌어 내고 토론을 통해 지혜를 모으는 방식입니다. 국가의 중대사를 논할 때도, 집현전 학사들과 격의 없는 논쟁을 벌일 때도 세종은 가장 먼저 신하들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박현모 세종리더십연구소장의 분석에 따르면 세종의 의사결정은 회의를 통한 것이 63%, 명령이 29%였습니다. 반면 그의 아들인 세조는 명령이 75.3%, 회의가 20.9%였죠. 박 소장은 “강력한 왕권을 가진 군주였지만 모든 결정을 신하들과 의논해 내렸다”고 설명합니다. 세종은 전분 6등법과 연분 9등법으로 나눈 토지조세 제도를 실행하기에 앞서 무려 17년 동안 일반 백성 16만 명의 의견을 조사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질문을 던지고 토론하며 경청하는 스타일은 그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임금의 반열에 올려놓았습니다. 이 같은 세종의 공부법은 과거 뿐 아니라 미래 사회에도 더욱 절실히 필요합니다. 인공지능(AI)으로 대표되는 4차 혁명 시대에는 공부의 개념 자체가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마크 저커버그가 졸업한 필립스 액시터 아카데미는 모든 수업이 토론식이다. 원탁에 둘러앉아 스스로 공부해온 지식을 남들과 공유하며 지혜를 키운다. 저커버그는 이 학교 출석부의 애칭(facebook)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자신의 회사 이름을 지었다. [중앙포토]

마크 저커버그가 졸업한 필립스 액시터 아카데미는 모든 수업이 토론식이다. 원탁에 둘러앉아 스스로 공부해온 지식을 남들과 공유하며 지혜를 키운다. 저커버그는 이 학교 출석부의 애칭(facebook)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자신의 회사 이름을 지었다. [중앙포토]

 지금까지의 공부는 지식과 정보를 습득하고 이를 전달하는 것이 주였습니다. 나보다 더 많이 아는 누군가로부터 무언가를 배우는 것을 공부라고 생각했죠. 이때의 지식은 일종의 탑을 쌓는 것과 같았습니다. 자연과 사회의 무질서 속에 보이는 무수한 정보들 사이에서 패턴과 규칙을 찾아내 그들 사이의 인과관계를 조사하고 이들을 체계화 해 견고한 탑을 쌓는 것이죠. 탑이 높아지고 규모가 커질수록 전문가로 칭송 받았습니다. 
 
 그러나 미래 사회에선 그 많은 지식을 모두 안다는 게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알아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또 지식의 분야는 더욱 세분화 되고 반감기가 짧아지면서 평생을 쌓은 탑이 어느 한 순간 쓸모없이 무너져 내릴 수도 있습니다. 네이버와 구글에 키워드만 치면 웬만한 전문지식까지 모두 쏟아져 나오는 시대엔 탑을 얼마나 높이, 크게 쌓느냐는 과거처럼 중요하지 않은 거죠.
 
 결국 앞으로의 공부는 지식과 정보를 쌓는 일이 아닙니다. 자신의 분야에서 기존의 정보를 취합해 인과관계를 만들고, 다른 분야와 융합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 내는 과정입니다. 달리 말하면 과거엔 쌓은 탑의 높이와 크기가 중요했다면, 4차 혁명 시대엔 탑의 도면을 얼마나 빠르게 잘 그린 후 탑을 적절하게 쌓을 수 있는지, 그 ‘축성’ 능력이 중요해진다는 겁니다.  
미래학자인 토마스 프레이 다빈치연구소장. [다빈치연구소]

미래학자인 토마스 프레이 다빈치연구소장. [다빈치연구소]

 이는 무엇을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가에 대한 오랜 통념을 뒤흔들게 될 겁니다. 지식의 재생산이 목적이었던 교육, 즉 고정된 지식의 체계를 습득하고 이를 현실에 적용하는 전통적인 교육 시스템은 곧 붕괴한다는 거죠. ‘인간혁명 2회’에서 살펴봤듯 ‘학교의 종말’이 오고 있습니다. “2030년 세계 대학의 절반이 사라진다”는 토마스 프레이(미래학자)의 말처럼 우리는 새로운 교육을 추구하고, 이전과는 다른 공부법을 터득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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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4차 혁명 시대의 배움에 가장 가까운 것은 바로 ‘세종의 공부법’입니다. ‘질문하고 토론하라’는 세종의 공부법은 미래 사회에 꼭 필요한 교육 방식입니다. 언제 없어질지도 모를 현재의 직업과 그 안에서 비롯된 전문 지식들을 주입하는 공부는 그만두고 스스로 지식의 탑을 쌓을 수 있는 역량을 키워내야 합니다. 국어·영어·수학 등과 같은 교과목 중심의 교육 시스템을 버리고 문제해결력과 창의성, 협업능력 등을 키우는 ‘역량’ 교육이 필요한 때입니다.  
 
 의학계에선 이미 AI 의사 왓슨(Watson)이, 법조계에선 AI 변호사 로스(Ross)가 자신의 업무 영역을 넓혀가고 있습니다. 왓슨은 수십만 명의 환자 정보와 최신 의학 이론을 검색해 맞춤 처방과 진단을 내놓습니다. 로스는 수천만 페이지에 달하는 기존의 판례를 분석해 판결의 기초 자료를 제공합니다. 무수한 정보를 취합하고 통계를 활용해 산술적으로 조합하는 능력은 AI를 따라갈 수 없습니다. 대신 인간은 AI가 할 수 없는 더욱 창의적이고 인간적인 일을 해야 합니다. 세종처럼 새롭게 질문을 던지고, 타인과 교감하며 통섭할 줄 아는 힘을 기르는 것이 미래 교육의 핵심이 돼야 합니다.  
유대인인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언제나 거리낌없이 토론하는 것을 즐겼다. [사진 김영사]

유대인인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언제나 거리낌없이 토론하는 것을 즐겼다. [사진 김영사]

 외국에서도 세종과 비슷한 공부법의 사례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바로 유대인들의 ‘하브루타’입니다. 유대인은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를 따라 유대인 여부가 결정되는 걸로 유명하죠. 즉, 다른 민족처럼 부계의 혈통이 아니라 모계로부터 전해오는 문화적 전통과 배움의 방식이 중요하다는 이야깁니다. 그 문화와 배움의 핵심에 있는 것이 ‘하브루타’입니다.  
 
 ‘하브루타’는 히브리어로 ‘짝’이라는 뜻입니다. 유대인은 어릴 때부터 짝을 지어 모든 공부를 토론식으로 하는 ‘하브루타’에 익숙합니다. 가정에서 밥 먹을 때, 학교에서 공부할 때 등 모든 상황에서 질문하고 토론하죠. 이스라엘의 대학 도서관이 우리처럼 조용하지 않고 토론하는 학생들로 시끌벅적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유대인이 전 세계 인구의 0.2%에 불과하지만 2014년까지 노벨상 수상자의 22%(195명)를 배출한 이유도 ‘하브루타’의 힘이 큽니다.  
 하브루타의 효과는 실제 교실에서도 증명됩니다. 2014년 부산교대 석사논문(장영숙)에 따르면 3개월 동안 하브루타 방식으로 과학수업을 진행했더니 일반수업보다 탐구능력 향상도가 월등히 높았습니다. 부산의 한 초등학교 교실 두 반을 비교했는데 하브루타 수업의 경우 과학탐구능력이 77.1점에서 103.1점(만점 120점)으로 높아진 반면 일반수업(79.2→76.9점)은 효과가 없던 것이었죠.
 
 이는 미국 행동과학연구소의 ‘학습 피라미드’ 이론으로도 설명됩니다. 연구소에 따르면 학습 후 24시간 뒤 기억에 남는 비율이 일방적 수업은 5%에 불과했지만, 토론(50%)과 체험·실습(75%) 등 참여형 학습의 효과는 매우 뛰어났습니다. ‘세종의 공부법’과 ‘하브루타’는 이 같은 여러 가지 학습 방식을 모두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효율성이 높을 수밖에 없습니다.
 세종이 처음 훈민정음을 발표할 당시 조정의 신료들과 양반계층이 크게 반발했던 이유는 조선 시대에는 ‘문자’가 곧 ‘권력’이었기 때문입니다. 문자는 지식을 습득하는 주된 수단이었고, 지식을 독점해야만 당시의 신분질서를 쉽게 유지할 수 있었죠. 백성 누구나 쉽게 쓸 수 있는 한글이 널리 퍼져 지식이 대중화 되는 것을 막고 싶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종의 생각은 정반대였습니다. 백성들도 글을 깨우쳐 억울한 일을 겪지 않도록 했고, 학문을 익혀 자신의 재주를 펼칠 수 있도록 권장했습니다. 노비였던 장영실이 명나라 유학까지 다녀와 최고의 과학자가 된 것도 이 같은 세종의 뜻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미래는 지금까지 우리가 견고하다고 믿어왔던 많은 지식들이 붕괴되는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에는 전문가들이 쌓아 왔던 지식의 장벽도 허물어지고, 학문 간 경계도 사라집니다. 이때 우리의 리더들은 어떤 생각을 가져야 할까요. 문득 세종의 생각이 궁금해집니다.  
 
 “백성들이 무지해서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잘못된 행동을 하지 않도록 돕는 것이 왕의 역할이요. 농사짓는 사람들은 근심과 탄식이 없게 하는 것 또한 왕의 역할이다. 왕을 보좌하는 신하는 백성을 위해, 후대를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성과를 내야 하느니라.”(세종이 집현전 학자들에게 한 말)
 
윤석만 기자 sam@joongang.co.kr  
 
# ‘윤석만의 인간혁명’은 매주 토요일 아침 업데이트 됩니다. 
윤석만 기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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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일보 교육팀 소속인 윤 기자는 2010년부터 교육 분야를 취재했다. 특히 인성·시민 교육 및 미래에 관심을 갖고 관련 보도에 집중했다. 앞으로의 사회에선 성적과 스펙보다 협동과 배려, 공감 같은 인성역량이 핵심능력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이를 주제로 ‘휴마트(humanity+smart) 씽킹’이란 책을 내기도 했다. 중앙인성연구소 사무국장을 겸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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