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본문

[복지온돌방]"무연고 노인 900여명 장례 손수 치렀죠" 손문권 이일성로원 대표

중앙일보 2017.09.17 05:00
배너를 클릭하면 '복지온돌방 36.5'를 더 보실 수 있습니다.

배너를 클릭하면 '복지온돌방 36.5'를 더 보실 수 있습니다.

1960년 65세 이상 노인은 총인구의 2.9%에 불과했다(행정안전부). 전쟁 후 가난하고 집 없는 노인들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밥과 잠자리를 구걸하던 때였다. 정부의 복지 정책이 제대로 자리 잡지 못했던 시기, 돌봐줄 사람이 없어 굶고 병든 체 쓸쓸히 숨지는 노인이 적지 않았다. 
'어르신들의 맏아들'을 자처하는 손문권 이일성로원 대표가 시설 어르신100세 생일 잔치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사진 이일성로원·보건복지부]

'어르신들의 맏아들'을 자처하는 손문권 이일성로원 대표가 시설 어르신100세 생일 잔치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사진 이일성로원·보건복지부]

1959년 당시 16세였던 손문권(74) 이일성로원 대표는 어머니 이정희씨가 설립한 이곳에서 어르신들의 '맏아들'이 됐다. 가족 없이 숨을 거둔 920여명의 무연고 어르신의 장례를 도맡아 치렀고, 어르신이 굶주리지 않게  논·밭·과수 농사에서 소·돼지 사육까지 손발이 부르트게 일했다.
 
숨은 봉사자들의 따뜻한 이야기
그는 결핵․폐렴 환자를 분리할 수 있는 시설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보건복지부를 설득했고, 전국 1호 요양원 허가를 받았다. 1990년대에는 가정에서 홀로 숨지는 ‘고독사’를 예방하기 위해 지자체와 협의해 현재의 재가방문 서비스를 선도적으로 시작했다. 자신이 '어르신' 대접을 받을 나이가 됐어도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요양시설 어르신을 모시고 병원을 찾고, 식탁에 올릴 채소를 가꾸며 지낸다. 
 
손 대표는 최근 서울 영등포구 63시티에서 열린 ‘제18회 사회복지의 날 ’기념식에서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57년간 노인 복지 발전을 위해 헌신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그는 “나만 했던 일이 아닌데, 과분한 상을 받은 것 같다”며 “건강이 허락하는 한 어르신들과 함께 웃으며 살고 싶다”고 말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어르신들을 돌보게 된 계기는.
1960년대 보육원·양로원은 대부분 종교인이 설립했다. 광주 동구의 이일 성경학교를 졸업한 동창생 20여명이 자비를 내고, 기부금을 모아 만든 양로원이 ‘이일성로원’이다. ‘이일’이란 뿌리에 거룩할 성(聖)․늙을 노(老)를 붙여 지은 이름이다. 전도사였던 어머니가 이곳의 초대 원장을 맡으셨다. 나도 어머니의 뜻에 따라 개원 할 때부터 어르신을 돌보기 시작했다.
 
1959년 설립 당시 이일성로원의 모습 [사진 이일성로원·보건복지부]

1959년 설립 당시 이일성로원의 모습 [사진 이일성로원·보건복지부]

이일성로원 보수 공사를 하는 손문권 대표 [사진 이일성로원·보건복지부]

이일성로원 보수 공사를 하는 손문권 대표 [사진 이일성로원·보건복지부]

이일성로원 보수 공사를 하는 손문권 대표 [사진 이일성로원·보건복지부]

이일성로원 보수 공사를 하는 손문권 대표 [사진 이일성로원·보건복지부]

양로원을 운영하기 어렵지 않았나.
어르신들의 의식주를 해결하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초창기에는 어머니가 교회·보육 시설·군부대를 찾아다니며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다 이대로는 지속성이 없다는 생각을 하셨고, 정부 지원을 받도록 1965년 재단법인 인가를 받았다. 생활비 일부는 시설 자체 수입으로 충당하는 조건이었다. 지원을 받긴 했지만 몰려드는 어르신들을 감당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산을 개간해 논·밭농사를 짓고, 밤·감 농장에 양잠까지 안 해본 것 없이 일했다. 어르신들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셨고 다행히 기반을 잡게 됐다.
 
어린 나이부터 봉사의 삶을 살았다.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나.
어머니는 “네가 먹고 남은 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 너의 것을 나눠야 진정 이웃을 돕는 일”이라고 말씀하셨다. 어르신을 위해 일을 한다고 나만 배부르게 먹지 않았다. 내 밥의 절반을 어르신께 덜어주고, 배가 고파도 웃으며 어르신을 섬겨야 한다는 생각을 심어주셨다. 어머니는 재산 욕심보다 사람 욕심이 많았던 분이다. 그런 모습을 보며 봉사의 의미를 자연히 깨닫게 됐다
손문권 이일성로원 대표(오른쪽)와 어머니 이정희씨 [사진 이일성로원·보건복지부]

손문권 이일성로원 대표(오른쪽)와 어머니 이정희씨 [사진 이일성로원·보건복지부]

무연고 노인의 장례도 직접 치렀다고 하던데.
1960~70년대는 국민연금도 건강보험도 없었던 때다. 60대에 거의 다 돌아가셨다. 양로원은 무료로 운영됐고, 생활보호대상자만 들어올 수 있었다. 가족이 없거나, 자녀가 장애가 있어 부모를 모시기 어려운 분들이었다. 가시는 길이라도 외롭게 않게 해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직접 관을 짜고, 염을 해서 법인 소유 산에 묻어드렸다. 200여기의 묘지 벌초도 직접 했다. 비석을 세울 수는 없었지만, 묘적부를 만들고 위치를 지도에 표시해 늦게라도 후손들이 찾아 오면 파내 보내드렸다. 지금은 법이 만들어져서 가족 없는 어르신이 돌아가시면 땅에 묻지 않고 화장해 납골당에 모신다. 복지 정책이 많이 개선돼 다행이라 생각한다.
손문권 이일성로원대표와 직원들이 무연고 어르신의 장례를 치르고 있다. 손 대표는 1960년부터가족 없이 숨진어르신 920여명의 장례를 직접 치렀고, 200여기의 묘지 벌초를 해왔다 . [사진 이일성로원·보건복지부]

손문권 이일성로원대표와 직원들이 무연고 어르신의 장례를 치르고 있다. 손 대표는 1960년부터가족 없이 숨진어르신 920여명의 장례를 직접 치렀고, 200여기의 묘지 벌초를 해왔다 . [사진 이일성로원·보건복지부]

손문권 대표가 만든 묘적부. 시기별로 돌아가신 어르신 묘지 위치를 적고 지도에 표시해 후손들이 늦게나마 찾을 수 있게 만들었다. [사진 이일성로원·보건복지부]

손문권 대표가 만든 묘적부. 시기별로 돌아가신 어르신 묘지 위치를 적고 지도에 표시해 후손들이 늦게나마 찾을 수 있게 만들었다. [사진 이일성로원·보건복지부]

어르신 복지 정책에도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어르신들과 가깝게 지내다보니 꼭 필요한 점들이 눈에 보였고, 직접 나서야 겠다고 생각했다. 40~50년 전만해도 어르신들이 결핵․폐렴․피부병에 잘 걸렸는데 좁은 양로원에 한꺼번에 지내니 감염도 잘됐다. 1980년대 초 전남도청과 보건복지부를 찾아가 “환자를 분리 수용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지금의 요양원 개념이다. 복지부가 현장실사를 진행했고, 관련법이 개정되면서 전국 1호 요양원 설치 허가를 받았다. 1990년대부터는 어르신들이 외롭게 돌아가시는 ‘고독사’가 사회적인 문제로 떠올랐다. 어르신이 사망한지 3개월 후 발견됐다는 뉴스를 보고 큰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광주시에 제안해 4000여호 이상 독거어르신들을 돌봐드리는 재가서비스를 시작했다. 자원봉사자를 모집해 주거지 근처 독거 어르신과 결연을 맺게 하고, 후원자를 모집해 경제적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자원봉사자들에게 고마운 마음에 봉사자·어르신과 함께 봄·가을로 여행을 떠났다. 이들의 도움과 희생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손문권 이일성로원 대표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 어르신들과 함께 웃으며 살고 싶다"고 말했다. [사진 이일성로원·보건복지부]

손문권 이일성로원 대표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 어르신들과 함께 웃으며 살고 싶다"고 말했다. [사진 이일성로원·보건복지부]

향후 계획이 있다면.
우리 주변에는 도움이 필요한 어르신들이 많다. 미약하지만 어르신의 종합적인 복지 체계를 마련하려 노력했고, 앞으로도 이를 위해 힘쓰고 싶다. 시설 어르신을 챙기고, 독거 노인을 감싸며 건강이 허락하는 한 어르신들과 함께 함께 웃으며 살고 싶다.
박정렬 기자 park.jungryul@joongang.co.kr
중앙일보와 카카오톡 친구가 되어주세요!
기자 정보
박정렬 박정렬 기자

뉴스 공유하고 선물 득템!

Innovation Lab

트렌드뉴스

많이 본 뉴스
댓글 많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