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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회장님’의 계약 위반

중앙일보 2017.07.18 02:33
김세정 런던 GRM Law 변호사

김세정 런던 GRM Law 변호사

어떤 회사의 ‘회장님’이 자신의 차를 운전하는 기사에게 욕설이 섞인 폭언을 퍼부었다는 한국 뉴스를 보고 꽤 아연해졌다. 폭언의 내용을 읽어 보니 외모에 대한 것부터 부모에 대한 악담까지 있더라. 그러고 보면 한국인이 가장 못 참는 욕이 부모 욕인 것 같다. 아무리 보잘것없거나 막 나가는 인생이라도 제 부모를 욕할 때는 분연히 맞서 싸워야 하는 법. 그것이 한국인의 유전자에 각인돼 있는 원칙 같은 것 아닌가 말이다.  
 
사실 이 뉴스에 아연해진 이유는 욕의 내용 때문만은 아니다. 이런 일이 여전히 한국에서 일어나는 것을 볼 때면 당황하게 되는 것이다. 외국에 나가서 사는 사람들은 자기가 떠난 시점의 상황을 기준으로 한국을 본다고들 한다. 말하자면 경제적으로 어렵던 시절에 한국을 떠나 선진국에 정착했던 사람들이 아무리 인터넷이며 뭐며 해서 경제적으로 성장한 고국의 모습을 본다고 하더라도 실감이 나지 않는 식이다. 그러니 이제는 한국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을 가지고 자랑을 하고 생색을 내기도 하는 것이고.
 
이와 유사하게 나는 내가 떠나올 때 한국 상황에 비춰 한국의 분위기가 훨씬 성숙했을 것이라고 은연중 믿고 있는 것이다. 당시 그러니까 21세기에 들어선 직후 한국은 인권에 대해 강조하기 시작했고 개인의 다양성을 고려하는 분위기도 생겼다. 학교나 군대 등에서의 폭력에도 단호한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차별금지법이 처음으로 발의되었고, 뒤이어 인권조례와 같은 것들도 생겨났다. 사회란 대개는 발전하지 아니하던가. 당연히 당시보다 진일보한 사회가 돼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물질적 성장에 발맞춰 정신적으로도 성숙했을 거라고. 그러니 이런 참으로 후진적인 사건이 한국에서 일어나는 것을 볼 때마다 아연해진다.
 
게다가 이런 일은 영국에서는 벌어지기 어려운 일이다. 영국에서 직원에게 이 정도로 극단적인 폭언을 퍼붓는다면 결과적으로 회사에 큰 손해가 된다는 것이 이미 상식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만일 직원이 정말 중대한 과실을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회사가 할 수 있는 것은 제대로 절차를 밟아 해고하는 것뿐이다. 불필요하게 강한 질책을 했다가는 사직서를 내고 나간 직원으로부터 십중팔구는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는 내용의 소송을 당할 것이다.
 
관련 기사의 댓글에 뜻밖에 회장을 옹호하고 운전기사를 비난하는 것이 상당수 보였다. 인상 깊은 것 중 하나가 ‘운전기사란 회장님을 가장 근거리에서 보좌하는 사람이고 무슨 소리든 다 듣는 것이 직업인 사람이니 그걸 까발리는 것은 프로페셔널한 직업 윤리가 없는 것이다’라는 내용이었다. 이건 말하자면 회장의 운전기사로 들어간 이상 욕이든 뭐든 다 듣고 참아야 한다는 것인가 보다.
 
회장도 본인이 월급을 준다는 것을 매우 강조하고 있었다. 돈을 주었으니 어떤 짓이라도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듯이. 운전기사 역시 그 월급 때문에 욕설을 참고 견딘 것이었으리라. 그러나 따지고 보면 운전기사는 회장과 계약을 맺은 것뿐이다. 이 계약에 따르면 운전기사는 운전이라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회장은 그에 합당한 임금을 지급하도록 되어 있다. 서비스를 제공하는 측은 성실하게 그 업무를 수행해야 하지만 욕이나 폭언을 듣는 것까지 계약 내용에 포함되지는 않는다. 그러니 폭언 내지 욕설을 하는 것은 회장 측의 계약 위반이다. 또한 월급을 지급하는 것은 서비스에 대한 반대급부로서 회장 측이 지는 의무인 것이지 은혜를 베푸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돈을 준다는 사실이 돈을 받는 사람의 인격을 모독할 수 있는 자격증이 되는 것은 아니다.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맺는 많은 고용계약이나 상거래는 금전을 지급함으로써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그 금전으로는 정해진 양의 시간과 정해진 종류의 서비스를 구매하는 것일 뿐 그 인간 자체를 사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비단 ‘회장님’에게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김세정 런던 GRM Law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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