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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아침] 맨드라미 손목을 잡고

중앙일보 2017.07.18 02:33
맨드라미 손목을 잡고
-이승희(1965~)  
 
내가 말을 잃고  
고양이처럼 울 때
맨드라미 흰 손목에 그어지던 햇살
칼자국처럼 가늘고 창백했다
내가 골목 끝에 이르러
지나친 집의 주소를 잃고  
떠다닐 때
맨드라미 손목
붉은 피 핥으며 살았다
나 그렇게 견뎠다
녹슬어가는 자전거와 골목 사이 공터에서
맨드라미 손목은 울음 같았고
혼자 그네를 밀고 있는 기다림은
살을 입고, 피가 도는지
한없이 붉어지고
붉은 둘레를 걸어다니며
나 오직 먼지가 되기 위하여
맨드라미 뿌리에 닿기 위하여
폐관하는 저녁
저 물 속 어디쯤 내가 떠나온 자리라고
아무리 돌을 던져도 그만 잠들고 싶다고
(…)
 
 
맨드라미의 손목에 칼자국처럼 그어지던 햇살. 맨드라미 손목 붉은 피 핥으며 울음 같은 맨드라미 손목을 잡고 붉은 둘레를 걸어다니는 젊음의 피곤. 상상 이상의 폐허와 상상 이상의 상처와 붉은 자멸적 열정을 본다. 아는가, 저 붉은 맨드라미의 죽음에 젖은 카르페 디엠을. 
 
<김승희·시인·서강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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