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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한 호텔] 알프스 해발 3100m, 완벽한 적막 속 하룻밤

중앙일보 2017.07.17 00:01
귀가 예민하다. 김한민의 그림소설 『비수기의 전문가들』 속 주인공처럼 한국인의 가래침 뱉는 소리가 싫어 포르투갈까지 갈 정도는 아니어도 ‘타인의 귀’를 배려하지 않는 모든 소리에 도무지 적응이 안된다. 버스에서 어금니로 껌을 딱딱 씹는 사람, 지하철에서 스마트폰 볼륨을 키운 채 드라마 보는 사람을 마주칠 때마다 포르투갈이든 어디로든 날아가고 싶다. 심지어 음악도 시의적절한 상황에서 즐기는 것만 좋아한다. 분위기와 안 어울리는 음악을 트는 카페에서는 나가면서라도 기어이 한 마디 한다. “이런 전망 좋은 카페에서 EDM(비트가 강하고 빠른 전자음악)은 좀 아니지 않나요?” 이어폰 꽂고도 일 잘하는 사람이 존경스럽고 아무데서나 머리만 대면 잠드는 사람이 부럽다. 
귀 때문에 이렇게 인생이 피곤하다 보니, 내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사치는 완벽한 적막이 보장되는 곳에서 쉬는 것이다. 
TV가 없어도 좋고, 며칠쯤은 인터넷이 통하지 않아도 괜찮다. 디지털 디톡스? 그런 거창한 수식어는 필요없다. 그냥 고요하면 된다. 사막이나 고산지대, 인파 적은 해변에 끌리는 건 그래서다.
이 시대에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사치는 도시의 소음을 벗어나 적막과 고요 속에서 하룻밤 지내는 게 아닐까. 이런 호텔에서 말이다. 스위스 알프스 해발 3100m에 위치한 쿨름호텔. [사진 3100 쿨름호텔]

이 시대에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사치는 도시의 소음을 벗어나 적막과 고요 속에서 하룻밤 지내는 게 아닐까. 이런 호텔에서 말이다. 스위스 알프스 해발 3100m에 위치한 쿨름호텔. [사진 3100 쿨름호텔]

몇 해 전, 스위스의 최고 높이 호텔에 묵은 일이 있다. 겨울엔 스키, 여름엔 등산객이 몰려드는 산악 휴양지 체르마트에서였다. 리조트와 식당이 몰려 있는 체르마트 마을에서 산악열차 고르너그라트 반(Gornergrat Bahn)을 탔다. 톱니바퀴의 힘을 빌어 꾸역꾸역 산을 오른 열차는 40분 뒤 종점 고르너그라트에 도착했다. 아득하게만 보였던 마테호른(4478m)이 눈앞으로 성큼 다가와 있었다. 
체르마트에서 고르너그라트 산악열차를 타고 종점에 도착했다. 마테호른 봉우리가 손에 닿을 듯 가까웠다.

체르마트에서 고르너그라트 산악열차를 타고 종점에 도착했다. 마테호른 봉우리가 손에 닿을 듯 가까웠다.

고도계를 보니 해발 3100m. 백두산(2744m)보다는 높지만 8000m급 히말라야 고봉들에 비하면 허리춤도 안되는 높이다. 하지만 숫자가 중요한 건 아니었다. 주변은 온통 눈천지였다. 눈에 반사된 햇볕이 얼마나 강렬한지 선글라스가 무용지물로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고요했다. 마지막 손님을 내린 열차가 떠나고 나니 까마귀 우는 소리 외에는 정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호텔 객실에서 본 마테호른. 아담한 객실에서는 기분 좋은 향기가 났다. 알프스에 사는 '아롤라 파인' 나무 향기다.   

호텔 객실에서 본 마테호른. 아담한 객실에서는 기분 좋은 향기가 났다. 알프스에 사는 '아롤라 파인' 나무 향기다.   

캐리어를 끌고 기차역 위쪽에 보이는 건물로 향했다. 두 개의 커다란 돔, 그러니까 옥상에 있는 천문관측 시설 때문에 도무지 호텔처럼 보이지 않는 건물이 이날 묵을 ‘3100 쿨름 호텔(kulm hotel)’이었다. 이름 참 쉽다. 해발 3100m에 있는 봉우리(kulm) 호텔. 스위스에 수많은 쿨름호텔이 있지만 이 호텔이 단연 최고의 높이를 자랑한다. 역사도 깊다. 무려 1896년에 지어졌다. 고르너그라트 산악열차 개통 2년 전이다. 
호텔의 22개 객실은 호텔에서 보이는 4000m급 봉우리와 그 높이를 이름으로 달았다. [사진 3100 쿨름호텔]

호텔의 22개 객실은 호텔에서 보이는 4000m급 봉우리와 그 높이를 이름으로 달았다. [사진 3100 쿨름호텔]

4190 쉬트랄호른. 호텔 프론트에서 배정해준 객실이다. 22개 객실의 이름은 모두 이런 식이다. 호텔에서 보이는 4000m급 봉우리 이름과 그 높이다. 더블룸 면적은 15㎡(4.5평)로 아담했다. 객실 내부는 단 세 가지 색으로 이뤄졌다. 새하얀 벽과 알프스 토종 침엽수인 ‘아롤라 파인’으로 만든 가구, 그리고 감색 카페트와 커튼. 호텔 홈페이지에는 “투숙객이 창밖 경관에 집중하도록 미니멀리즘 컨셉트로 객실을 디자인했다”고 쓰여있었다. 커튼을 젖히니 마테호른과 알프스 고봉이 눈부셨다. 객실 안에 어떤 장식도 필요하지 않은 이유를 알 만했다.
오후 8시30분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객실 요금에 저녁과 아침식사 두 끼가 포함돼 있었다. 호텔 밖엔 식당은커녕 수퍼마켓도 없으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레스토랑은 숙연함마저 느껴질 정도로 조용했다. 몇몇 백인 커플을 제외하고는 동양인이 대부분이었다. 모두 일본인 같아보였다. 레스토랑 직원마저 속삭이듯 주문을 받았다. 포크와 나이프가 조심스레 그릇에 닿는 소리, 와인 잔 부딪히는 소리가 이따금 정적을 깨뜨렸다. 4코스 정찬을 먹었는데 맛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한국에선 너무 낯설었던 그 차분함만이 기억에 가득하다. 
호텔 레스토랑에서 먹은 저녁식사의 메인요리. 객실 요금에 4코스 정찬과 조식이 포함돼 있다. 맛도 좋은 편이지만 맛보다 적막한 분위기가 더 기억에 남는다. 

호텔 레스토랑에서 먹은 저녁식사의 메인요리. 객실 요금에 4코스 정찬과 조식이 포함돼 있다. 맛도 좋은 편이지만 맛보다 적막한 분위기가 더 기억에 남는다. 

나중에서야 호텔 직원에게 들었다. 이 호텔이 일본인들 사이에서 버킷리스트로 꼽힌다는 사실을. 평생 소원을 이뤄 먼 이곳까지 왔는데도 일본인들은 호들갑을 떠는 법이 없었다. 셀카봉을 펼치거나 재미난 인증샷을 찍겠다며 우스꽝스러운 포즈를 취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호텔 안에서든 밖에서든 가만히 걸었고, 목소리를 낮춰 대화를 나눴다. 마치 성지순례자처럼. 
3100 쿨름 호텔은 일본인들의 버킷리스트라 한다. 일본인 방문객들은 마치 성지순례라도 온듯 엄숙하게 호텔에서 시간을 보낸다.

3100 쿨름 호텔은 일본인들의 버킷리스트라 한다. 일본인 방문객들은 마치 성지순례라도 온듯 엄숙하게 호텔에서 시간을 보낸다.

식사를 마치고 객실로 돌아왔다. 50개 케이블 채널이 나오는 TV도 있고, 무선인터넷도 잡혔지만 거들떠보지 않았다. 대신 창문을 열었다. 달이 밝았다. 하늘을 수놓은 별은 보이지 않았지만 달빛을 받아 환하게 빛나는 설산은 낮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해발 3100m가 아니라 지구 궤도 밖으로 벗어나 다른 행성에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바람소리마저 들리지 않았다. 우주를 유영하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싶었다. 한참을 창가에 서있다가 침대에 몸을 뉘었다. 이대로 깊은 잠에 빠지는 게 지금 이 순간 누릴 수 있는 가장 호사스러운 경험이리라. 완벽한 적막 속에 눈을 감았다. 맑은 밤하늘과 달빛 받아 환하던 설산이 내내 아른거렸다. 
자정 무렵 호텔 창밖 풍경. 이날은 달이 밝아 하늘을 수놓은 별을 보지 못했다. 

자정 무렵 호텔 창밖 풍경. 이날은 달이 밝아 하늘을 수놓은 별을 보지 못했다. 

호텔 바로 옆 절벽에서 야생염소를 만났다.

호텔 바로 옆 절벽에서 야생염소를 만났다.

◇숙소 정보= 3100 쿨름 호텔 객실(gornergrat-kulm.ch)은 마테호른 뷰와 몬테로사 뷰로 나뉜다. 마테호른 뷰가 몬테로사 뷰보다 비싸다. 식사 두 끼를 포함한 객실 최저 요금은 345~385스위스프랑(41만~46만원) 선이다. 체르마트~고르너그라트 왕복 산악열차는 94스위스프랑. 스위스패스 소지자는 반값에 살 수 있다. 고르너그라트 열차 홈페이지(asia.gornergrat.ch/ko)에서 쿠폰을 출력한 뒤 체르마트 산악열차 탑승장에서 보여주면 컵라면 교환권을 준다. 쿨름호텔 레스토랑에 이 교환권을 주면 컵라면과 온수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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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표 기자 spcho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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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표 최승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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