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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으로 공연장으로…목욕탕의 즐거운 변신

중앙일보 2017.07.17 00:01
동네 목욕탕. 30대 이상이라면 어린 시절 일주일에 한 번은 꼭 들렀던 이 공간이 이제 아련한 추억의 공간으로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목욕 끝나고 마셨던 시원한 바나나우유 맛은 아직도 생생한데 말이다. 목욕탕은 단순히 씻기만 하는 곳이 아니라 동네 사람들이 모여 두런두런 이야기꽃을 피우며 친목을 도모했던 동네 사랑방이기도 했다. ‘스파랜드’ ‘불가마’ ‘찜질방’ 등 대형 사우나가 생겨나면서 설 자리를 잃었던 동네 목욕탕이 최근 새 생명을 얻고 있다. 갤러리와 공연장, 안경 매장에 이르기까지 우리 생활과 가까운 공간으로 재탄생해 사람들의 발길을 끌어 당기고 있다. 윤경희 기자 annie@joongang.co.kr  
서울 마포구 아현동 행화탕. 6월 28일 '예술로 목욕하는 날' 행사의 입장권인 때수건을 손에 끼고 사진을 찍었다. 윤경희 기자

서울 마포구 아현동 행화탕. 6월 28일 '예술로 목욕하는 날' 행사의 입장권인 때수건을 손에 끼고 사진을 찍었다. 윤경희 기자

서울 마포구 아현동에는 지은 지 60년 된 조그만 동네 목욕탕 ‘행화탕’이 있다. 한동안 버려지다시피 했던 이곳이 최근 문화예술 공간으로 탈바꿈하면서 다시 사람들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지난 2월 문화예술콘텐트 기획사 ‘축제행성’이 문을 닫은 이 목욕탕을 문화·예술공간으로 운영한 이후부터다. 
지난 6월 28일 오후 3시 지하철 애오개역 1번 출구로 나와 아파트 단지 안쪽으로 난 골목 안으로 200m쯤 걸어 들어가니 빨간 굴뚝에 노란 간판을 단 단층 목욕탕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이름의 ‘행화’는 살구꽃을 의미하는데, 과거 아현동 일대에 살구나무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란다. 처음 지어졌을 땐 동네 랜드마크가 될 정도로 눈에 띄었을 빨간 굴뚝은 주변의 수십 층짜리 고층 아파트 단지 사이에서 마치 작은 장난감처럼 보였다. 
안으로 들어가보니 공간을 나눈 벽과 탕을 뜯어낸 게 전부. 오래된 시간의 켜가 쌓여있는 벽돌과 타일이 그대로 남아있는 목욕탕 안에 젊은이들이 가득했다. 가만히 있어도 등을 따라 땀이 주르륵 흐를 만큼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에어컨도 없는 이 공간에서 떠날 줄 몰랐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이곳에서 매달 한 번씩 여는 ‘예술로 목욕하는 날’ 행사를 보러 온 사람들이었다. 
오래된 타일과 칠이 벗겨진 지붕 골격이 그대로 드러난 행화탕 안에서 공연이 열렸다. [사진 축제행성]

오래된 타일과 칠이 벗겨진 지붕 골격이 그대로 드러난 행화탕 안에서 공연이 열렸다. [사진 축제행성]

이날은 5월말 ‘예술 목욕 개업식’에 이은 두 번째 행사일로 건축설계스튜디오 ‘크리티컬 매스 랩’의 ‘행화 건축 아카이브’ 전시와 성신여대 서비스디자인공학과 학생들의 설치 미술 전시, 공연 등이 하루 종일 이어졌다. 이날 구경온 이지은(23)씨는 “5월 행사 소식을 듣고 재밌을 것 같아 찾아왔다"며 "오래된 목욕탕에서 공연과 전시를 보는 맛이 색다르다”고 말했다. 
행화탕 행사에 들어가려고 줄을 선 사람들. 일부러 찾아온 대학생도, 지나가던 동네 아주머니도 함께 행화탕으로 들어갔다. [사진 축제행성 채드박]

행화탕 행사에 들어가려고 줄을 선 사람들. 일부러 찾아온 대학생도, 지나가던 동네 아주머니도 함께 행화탕으로 들어갔다. [사진 축제행성 채드박]

길을 지나가던 한 동네 할머니가 행화탕 안을 기웃거리며 “뭘 하는 거냐”고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젊은 행사 스태프가 “들어와서 커피 드시고 공연 구경도 하시라”며 안으로 안내하자 “그럴까”라며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외지인과 토박이가 이 공간 안에서 자연스럽게 섞였다. 
행화탕 뒤쪽 보일러실에 마련한 성신여대 서비스디자인공학과 학생들의 전시. 파란색 바 테이블로 사용한 것은 실제 옛날에 쓰던 때밀이용 간이 침대다. 윤경희 기자

행화탕 뒤쪽 보일러실에 마련한 성신여대 서비스디자인공학과 학생들의 전시. 파란색 바 테이블로 사용한 것은 실제 옛날에 쓰던 때밀이용 간이 침대다. 윤경희 기자

 
버려졌던 목욕탕의 변신
선글라스 브랜드 젠틀몬스터의 서울 계동 매장. 50년 넘은 이 목욕탕은 2016년 없어질 위기를 맞았지만 그 모습 그대로 매장이 됐다. [사진 젠틀몬스터]

선글라스 브랜드 젠틀몬스터의 서울 계동 매장. 50년 넘은 이 목욕탕은 2016년 없어질 위기를 맞았지만 그 모습 그대로 매장이 됐다. [사진 젠틀몬스터]

옷을 벗고 목욕 하던 공간이 이렇게 예술과 문화로 채워진 열린 공간이 됐다. 하긴 비록 전에는 옷을 다 벗었다는 차이만 있을 뿐 이미 이전부터 여럿이 모여 이야기 꽃을 피우던 장소가 아니던가.  
행화탕 외에 다른 목욕탕들의 변신 소식도 많다. 지은 지 50년 넘은 서울 종로구 계동의 ‘중앙탕’은 2016년 안경 브랜드 젠틀 몬스터 매장으로 바뀌었다. 얼마나 트렌디한지 여행객이 꼭 들르는 명소가 됐다. 당시 홍대입구·신사동·논현동에 매장을 가지고 있었던 젠틀 몬스터는 네 번째 매장으로 감성적 이미지를 가진 공간을 찾던 중 중앙탕이 없어진다는 소식에 매장을 여기에 꾸렸다. 
그런가하면 전북 군산 근대역사박물관 앞의 48년 된 ‘영화 목욕탕’은 2015년 ‘이당미술관’으로 거듭났다. 김부식 이당미술관 큐레이터는 “군산 영화동은 최근 근대역사문화권으로 재조명돼 2016년에만 3만 여명이 찾았을 정도로 여행객이 많다”며 “목욕탕이 미술관이 바뀐 게 신기하다며 일부러 찾아오는 이들도 꽤 많다”고 말했다. 부산 감천문화마을의 ‘건강탕’도 2012년 8월 목욕탕 컨셉트의 카페와 갤러리로 모습을 바꾼 후 감천문화마을의 명소로 자리 잡았다.
이밖에도 서울 성수동 유송사우나는 사진가 한강 씨의 작업실 ‘싸우나스튜디오’로, 전남 광주시 계림동 서광탕은 사진가 이내정 씨의 개인 스튜디오로 쓰이고 있다. 
전라북도 군산의 이당미술관. '영화 목욕탕'을 미술관으로 바꿨다. [사진 이당미술관]

전라북도 군산의 이당미술관. '영화 목욕탕'을 미술관으로 바꿨다. [사진 이당미술관]

이당미술관 내부. 탕과 수도꼭지만 떼어내고 오래된 타일벽은 그대로 놔뒀다. [사진 이당미술관]

이당미술관 내부. 탕과 수도꼭지만 떼어내고 오래된 타일벽은 그대로 놔뒀다. [사진 이당미술관]

이제는 목욕탕이다
젠틀몬스터 계동 매장. 작은 탕 안에 전시용 피스톨 기계를 설치했다. [사진 젠틀몬스터]

젠틀몬스터 계동 매장. 작은 탕 안에 전시용 피스톨 기계를 설치했다. [사진 젠틀몬스터]

서울 성수동을 중심으로 오래된 공장이나 창고를 개조해 카페, 갤러리로 바꿨던 재생건축 바람이 이젠 목욕탕으로 옮겨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엔 이유가 있다. 트렌드 분석가인 이향은 성신여대 교수는 “최근엔 무심하게 신경 쓰지 않은 느낌을 주는 낡은 건물을 멋스럽게 보는 트렌드가 있다”며 “오래된 목욕탕은 이런 트렌드에다 어린 시절 엄마를 따라가던 추억의 공간이란 스토리가 입혀져 더 매력적으로 다가운다”고 설명했다. 깔끔하고 딱 떨어지는 정돈된 현대적 디자인의 건물이나 시설에 대한 매력도가 떨어져 낡은 공간에 대해 매력을 느끼게 되는데, 목욕탕은 여기에 공유할 수 있는 이야기까지 입혀지니 사람들이 좋아할 수 밖에 없다는 얘기다. 
행화탕에 모인 사람들. 마치 옛날 목욕탕에서 하듯 피아노 공연을 보며 삼삼오오 모여 앉아있다. [사진 축제행성 채드박]

행화탕에 모인 사람들. 마치 옛날 목욕탕에서 하듯 피아노 공연을 보며 삼삼오오 모여 앉아있다. [사진 축제행성 채드박]

뉴욕과 서울에서 활동하는 건축가 안지용 매니페스토 디자인 대표 역시 “목욕탕은 공장에 비해 많은 사람들이 직접 경험해본 공간”이라며 “최근 세계적인 트렌드가 자신의 눈높이에서 즐길 수 있는 다양한 문화를 체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원래의 기능은 잃었지만 과거의 향수, 옷을 벗고 들어갈 수 있었던 특별한 장소라는 인식, 동네 사랑방 역할 등 목욕탕만이 가지는 공간의 특성이 사람들의 호기심과 흥미 일으켜 새로운 공간으로 인기를 얻는다는 설명이다. 그는 “여기에 목욕탕이 가진 튼튼한 건물 구조나 큼직한 면적도 새로운 공간으로 재생하기 딱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재생건축에 적합한 규모나 내구성을 지는 건물이 많이 남아 있지 않는 상황에서 목욕탕이 좋은 타깃이 된다는 얘기다. 
목욕탕 컨셉트로 내부를 꾸민 서울 한남동 카페 '옹느세자메'. 간판도 없는 이 카페는 목욕탕 인테리어로 유명세를 탔다. [사진 옹느세자메]

목욕탕 컨셉트로 내부를 꾸민 서울 한남동 카페 '옹느세자메'. 간판도 없는 이 카페는 목욕탕 인테리어로 유명세를 탔다. [사진 옹느세자메]

목욕탕 인테리어가 인기를 끌자 공간이 주는 느낌이 좋아 목욕탕도 아닌 곳을 목욕탕 컨셉트의 카페나 식당으로 꾸미는 사례도 나온다. 목욕탕의 큰 탕 모양으로 카페 내부를 꾸민 서울 한남동 카페 ‘옹느세자메’는 외진 곳에 있는데도 특이한 인테리어로 인기를 얻고 있다. “모르는 사람끼리 자유롭게 섞일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어 목욕탕 컨셉트를 선택했다”는 박기대 옹느세자메 대표는 “주변에서 목욕탕이 카페와 안 어울린다며 말렸지만 막상 문을 열고 보니 오히려 그게 재미있다며 손님들이 찾아온다”고 말했다.  
서상혁 축제행성 공동대표는 “과거 목욕탕에서 물로 몸을 씻었던 것처럼 이제 문화공간이 된 목욕탕은 문화·예술을 통해 빡빡한 일상에서 오는 스트레스와 고민들을 씻어낸다는 의미를 줄 수 있다”며 "앞으로 안쓰는 목욕탕들이 허물어 없어지기보다 이렇게 새로운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목욕탕의 변신이 어디까지 이어질 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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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경희 윤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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