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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연극판 뛰던 두 낭만 사나이 신스틸러로 뜨다

중앙일보 2017.06.20 01:10
부산 명륜동 연극 무대에서 연출자와 배우로 인연을 맺은 유재명(왼쪽)과 태인호. 요즘 드라마와 영화에서 독특한 개성 연기로 인기를 얻고 있다. 스튜디오에 나란히 선 두 사람은 “언젠가 우리 둘이 투톱인 작품을 찍을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

부산 명륜동 연극 무대에서 연출자와 배우로 인연을 맺은 유재명(왼쪽)과 태인호. 요즘 드라마와 영화에서 독특한 개성 연기로 인기를 얻고 있다. 스튜디오에 나란히 선 두 사람은 “언젠가 우리 둘이 투톱인 작품을 찍을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

영화나 드라마를 보다 보면 깜짝 놀라는 순간이 있다. 분명 내가 아는 배우라 생각했는데 그간 어디서도 보지 못한 얼굴이 드러날 때면 흠칫 놀라고 마는 것이다. tvN 주말드라마 ‘비밀의 숲’에서는 탐욕스러운 차장검사 이창준 역을, 스릴러 영화 ‘하루’에서는 매일 반복되는 사고의 주인공 강식 역으로 분한 배우 유재명(44)은 그런 측면에서 최근 가장 놀라움을 선사하는 배우다. 눈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오는 모습을 보고 ‘응답하라 1988’의 동룡이 아빠를 떠올리기 쉽지 않다.
 
이는 소위 ‘신스틸러’라 불리는 배우들의 공통된 특징이기도 하다. 주연배우에 비해 분량은 적고 할 일은 많으니 바삐 움직이되 중심이 흔들려선 안 된다. 그러다 보니 한 컷을 찍더라도 눈에 들어오게 하는 생존전략이 생겨난 셈이다.
 
JTBC ‘맨투맨’에서 액션 연기를 한 태인호.

JTBC ‘맨투맨’에서 액션 연기를 한 태인호.

최근 종영한 JTBC ‘맨투맨’에서 고스트 요원 서기철 역할로 활약한 태인호(37)도 마찬가지다. ‘태양의 후예’에서 송혜교를 사모하던 해성병원 이사장이나 사이코패스 같던 ‘미생’ 성대리와도 사뭇 다른 모습이니까. 이들은 대체 어디에 숨어있다 이제 나타난 걸까.
 
대학로에서 ‘발굴’되는 새 얼굴은 많다. 한데 두 사람은 무려 부산 명륜동에서 길어 올려진 새로운 피다. 생물교사를 꿈꾸며 부산대 생명시스템학과에 진학했던 유재명은 뒤늦게 연극에 빠져 2005년 극단 ‘배우, 관객 그리고 공간’을 설립했다. 이듬해 독일 극작가 뒤렌마트의 ‘멸망과 새로운 생명’을 국내 초연하며 인근 대학 연영과 학생들을 섭외했다. 경성대 연영과 출신인 태인호가 그중 한 명이다. 
청소년 연극단 멘토로 꾸준히 활동해온 유재명은 "어리숙한 선생님이었지만 아이들이 스스로 연극을 만들어 공연을 올리는 모습을 보면 아직도 뿌듯하다"며 연극에 대한 애정을 보였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청소년 연극단 멘토로 꾸준히 활동해온 유재명은 "어리숙한 선생님이었지만 아이들이 스스로 연극을 만들어 공연을 올리는 모습을 보면 아직도 뿌듯하다"며 연극에 대한 애정을 보였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세상은 망해가는데 지구에 온 이방인이 진리를 찾아 나서는 그로테스크한 실험극이에요. 열악한 환경에서 캐스팅을 어떻게 했겠어요. 같이 소주 먹고 막걸리 마시면서 꼬셨죠. ‘술은 물의 꿈이야’ 하면서. 지금 생각해보면 우습지만 그 철없는 낭만이 저희의 자양분인 것 같아요.”(유재명)
 
“형은 잔인하면서도 친절한 연출자였어요.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지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오기를 심어줬죠. 친구 따라 야자 빼먹고 노는 재미에 시작했는데 점점 더 재밌더라고요. 연기는 말이야 하는 개똥철학에 홀리고, 계속 토론하고 논쟁하는 변태적인 강박에 빠져들고.”(태인호)
 
tvN ‘비밀의 숲’에서 차장검사 역의 유재명.

tvN ‘비밀의 숲’에서 차장검사 역의 유재명.

치열하게 덤벼든 만큼 오래지 않아 한계에 부딪혔다. 부산이 좋아 부산에 남은 사나이들이었지만 정체를 실감한 것이다. 태인호는 “어느 순간 작품만 바뀌고 항상 사람은 똑같다는 걸 깨달았다”고 밝혔다. “여기서 벗어나보자, 다른 사람들을 만나보자 싶어서 2008년에 서울로 왔는데 아는 사람들이 없으니 이력서 들고 영화사를 일일이 쫓아다녔죠.” 다시 단역부터 시작해야 했지만 새로운 환경이 주는 설렘에 그는 마냥 신이 났다.
 
“모든 걸 쏟아붓고 나니 번아웃 증후군이 왔다”는 유재명도 비슷한 고민에 빠졌다. 15년 동안 연출 겸 배우로서 150편의 작품을 했으니 그럴만도 했다. 결국 마흔 즈음에 유재명은 무작정 서울로 향했고 두 사람은 2011년 겨울 대학로 ‘녹색태양’의 무대에서 재회했다.
 
배우 30명이 소극장 무대에 올라 관객과 소통하는 실험정신은 여전했지만 상황은 달라졌다. 이번엔 태인호의 극을 보러 왔던 소속사 부대표가 유재명의 연기에 반해 스카우트를 하고 한솥밥을 먹게 되면서 신기한 인연을 이어가게 됐다. 
 
태인호가 배우로서 갖는 강점은 선한 얼굴 뒤에 숨겨진 다양한 표정이다. 그는 "한 이미지에 갇히지 않고 여러 역할을 선보이고 싶다"며 여전한 목마름을 호소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태인호가 배우로서 갖는 강점은 선한 얼굴 뒤에 숨겨진 다양한 표정이다. 그는 "한 이미지에 갇히지 않고 여러 역할을 선보이고 싶다"며 여전한 목마름을 호소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본의 아니게 남들보다 늦은 출발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고삐를 조이는 촉매제가 됐다. 태인호는 “집안 식구들이 걱정이 많으셔서 이름도 여러 번 바꿨다”고 털어놨다. 본명 박상연에서 박지호로, 다시 태인호가 되면서 그에게도 고마운 이름들이 쌓여갔다. ‘미생’의 김원석 PD, ‘태양의 후예’·‘맨투맨’의 김원석 작가 같은 이들이다. 특히 ‘맨투맨’은 “전혀 다른 모습을 선보일 수 있어 행복”했던 드라마. 부산 중학교 후배인 박해진과 액션 합까지 맞출 수 있었다.
 
유재명은 “극본을 쓰며 유인해라는 필명을 사용한 적이 있다”고 했다. 사람에 취하는 걸 즐기는 낭만파답게 ‘사람의 바다(人海)’라는 뜻이었다. “사실 그동안 작품에 대한 욕심이 많아서라기 보다 거절을 잘 못해서 닥치는 대로 하게 된 것도 있는 것 같아요. 작품을 고르는 기준이 없었던 거죠. 돌이켜 보면 너무 개인적인 영역으로 바라보고 감정적으로 접근했던 것 같아요. 그것도 다 일인데. 지금은 남의 말을 잘 듣습니다. 그러다 보니 ‘비밀의 숲’처럼 지금 시대에 꼭 필요한 작품을 만난 것 같아요. 정의란 무엇인가를 전면적으로 다루다 보니 캐릭터 뿐만 아니라 드라마가 구축하고 있는 세계관 자체가 매력적입니다.”
 
이들의 다음 목표는 무엇일까. 유재명은 “궁극적으로는 영화 연출을 하고 싶다”고 밝혔다. “배우 속성을 너무 잘 알아서 때로 디렉션이나 컨트롤이 과할 때도 있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을 허투루 보지 않기 때문에 그 역시 장점으로 여긴다”고 덧붙였다. 태인호는 “속에 있는 걸 토해낼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며 “단편영화도 좋고, 연극도 좋을 것 같다”고 밝혔다. 서로 “30대 후반이 진짜 남자” “중년과 중년 전의 남자는 다르다”며 뜨거운 멜로 연기를 권하는 걸 보니 두 사람의 결혼 소식은 당분간 듣기 힘들 것 같다.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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