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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종이통장, 불안한 노령층

중앙일보 2017.06.20 01:00
“휴대폰? 자동화기기? 난 그런 기계로 하는 건 못 믿어. 내가 은행 직원을 만나서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 마음이 놓이지.”
 
지난 13일 서울 서대문구에서 만난 강옥영(80) 할머니는 디지털 금융에 관해 묻는 기자의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은행들이 지점을 없애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하자 “그럼 나 같은 노인네는 그냥 죽으란 말이냐. 만약 지점이 없어지면 버스 타고서라고 어떻게든 가야지”라고 말했다.
 
정보기술(IT)의 발전으로 금융서비스에 디지털 혁신 바람이 불고 있다. 하지만 디지털 환경에 익숙하지 않은 아날로그 세대의 금융 소외 현상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다. 한국정보화진흥원에 따르면 고령층의 디지털 정보화 지수는 전 국민 평균을 100으로 봤을 때 60대는 55.5, 70대 이상은 28.7에 그친다. 그만큼 디지털 기술 이용 정도나 능력이 뒤처진다는 뜻이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 역시 지난 2일 금융협의회에서 “스마트폰뱅킹 등 디지털 기술 확산은 활용도가 높아질수록 오히려 금융 소외 계층을 양산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디지털 금융의 흐름은 거세다. 시중은행은 스마트폰으로 간편하게 은행 업무를 볼 수 있는 모바일뱅킹 서비스를 앞다퉈 강화하고 있다. 모바일뱅킹에 파격적인 수수료·금리 우대를 제공해 고객을 끌어모은다. 비용이 많이 드는 오프라인 지점은 줄여가는 추세다.
 
자료: 한국정보화진흥원·금융감독원

자료: 한국정보화진흥원·금융감독원

금융당국도 이런 흐름에 적극적으로 앞장서고 있다. 금융감독원은 이미 2년 전에 밝혔던 종이통장 단계적 폐지 계획을 예정대로 추진키로 했다. 이에 따라 9월부터 은행에서 신규 계좌를 만들 때 종이통장을 원칙적으로 발행하지 않는다. 2020년 9월부터는 신규로 계좌를 개설할 때 종이통장을 만드는 고객에게 금융회사가 원가(5000~1만8000원)의 일부를 받을 예정이다.
 
인터넷·스마트폰 사용에 미숙한 고령층은 은행이 디지털 금융 이용자에 주는 각종 혜택에서 이미 소외되고 있다. 김주일(81)씨는 “스마트폰은 있지만 집 가까이에 은행이 있어 (모바일뱅킹을) 쓸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걸 쓰면 혜택이 있다는 것도 몰랐다”고 말했다. 하순연(76·여)씨는 “자녀들이 스마트폰으로 계좌이체 하는 것을 알려줘서 시도는 해봤는데 눈이 아파서 못하겠다”며 “창구에 가면 수수료를 더 받는 걸 이해할 순 없지만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이런 실정이다보니 금감원도 오는 9월 이후에도 예외적으로 종이통장을 발행 받을 수 있는 대상에 60세 이상 고객을 포함시켰다. 디지털 금융에 익숙하지 않은 고령층을 배려하기 위해서다. 대신 종이통장을 만들지 않는 사람에게 주는 금리우대와 같은 인센티브는 받지 못한다.
 
실제 거리에서 만난 고령층은 종이통장 폐지에 부정적인 반응이었다. 홍장미(73·여)씨는 “무조건 문서로 확인해야 마음이 놓인다. 종이통장이 사라지면 불안할 거 같다”고 말했다.
 
고령층도 자녀들이 모바일뱅킹 등을 이용하는 걸 보면서 디지털 기술이 편리하다는 건 안다. 하지만 본인이 직접 이용해야겠다는 필요성은 느끼지 못하고 있다. 딸을 통해 디지털 금융을 알게 됐다는 김교천(78)씨는 “나는 할 줄 모르기도 하고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며 “그런 건 워낙 복잡해서 원래 하던 대로 은행에 가서 하는 게 속 편하고 좋다”고 말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디지털 서비스에 대한 불신도 존재한다. 해킹이나 보이스피싱 등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디지털 금융서비스에 대한 고령층의 무관심과 막연한 불안감 때문에 금융 소외가 더 심화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아직 소수이긴 하지만 본인의 의지에 따라 디지털 금융 환경에 이미 완벽하게 적응한 고령층도 있다. 과거 직장에서 영업업무를 했다는 곽모(70·여) 씨는 외환 환전은 물론 예금 가입까지 스마트폰으로 해결한다. 그는 “텔레뱅킹을 하다가 은행 직원의 권유로 모바일뱅킹을 사용하게 됐다”며 “스마트폰으로 다 되니까 은행에 아예 갈 필요가 없고 종이통장도 꺼낼 일이 없다”고 말했다.
 
고령층의 모바일뱅킹 적응은 나이의 문제가 아니다. 장병준(83) 할아버지는 여든이 훌쩍 넘은 고령이지만 다른 건 몰라도 입출금내역 확인만큼은 모바일뱅킹으로 한다. 장 씨는 “은행 지점이나 자동화기기를 일부러 찾아갈 필요가 없어 편리하다”며 “은행 지점이 갈수록 줄어드는 추세라고 하니, 지금 쓰는 모바일뱅킹 기능을 배우려는 노력을 더 해볼 생각”이라고 했다. 결국 고령층의 인식부터 적극적으로 바뀌어야 금융 소외 현상을 극복해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금융회사가 고령층에 대한 적극적인 홍보와 맞춤형 디지털 서비스 개발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디지털 금융이 더이상 남의 얘기가 아닌 자신의 일로 느낄 수 있다면 고령층도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어서다. 이에 대해 임민순 국민은행 홍보팀장은 “은행 차원에서도 디지털 금융에 대한 고령 고객들의 적극적인 이용을 유도하기 위해 홍보와 교육에 더 힘쓰는 한편, 바이오 인증 기능 등 이들을 배려한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려는 노력을 병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준호 기자 ha.junho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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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애란 한애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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