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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yle_this week] 튀는 남자 사이에서 살아남는 법

중앙일보 2017.06.20 00:01
여름 옷감인 시어서커 슈트를 입은 모습. [사진 @niamh_cupl]

여름 옷감인 시어서커 슈트를 입은 모습. [사진 @niamh_cupl]

패션 동네 달력은 반 년을 앞서간다. 6월이면 벌써 가을·겨울 제품이 쏟아져 나오고, 그걸 보여주는 행사에 사람들이 몰린다. 세계 최대 남성복 박람회 피티워모(Pitti Uomo)도 그 중 하나다. 일년에 두 번, 1월과 6월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열리는데 나흘 행사에 무려 3만 5000~4만 명이 다녀간다. 업체 관계자와 바이어·기자는 물론 패션 블로거까지 각국에서 몰려 오면서 점점 숫자가 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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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연한 비즈니스 장이지만 꼭 비즈니스가 아니라 볼거리만으로도 가볼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남자들 북적대는 남성복 행사에 뭐 볼 게 있겠나 싶겠지만 이 남자들 옷차림이 범상치 않다. 말끔하게 차려 입은 클래식 슈트에 모자·양말·부토니에(슈트 라펠의 작은 구멍에 꽃모양 장식)까지 뭐 하나 허투루 더한 것이 없다. 또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갯빛 남성 패션을 직접 감상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곳도 바로 피티워모다.  
피티워모에서는 원색 옷차림의 남성들을 어렵지 않게 마주칠 수 있다. [사진 @dailyartur] 

피티워모에서는 원색 옷차림의 남성들을 어렵지 않게 마주칠 수 있다. [사진 @dailyartur]

다른 말로 하자면 패션세계에서만큼은 주류이자 기득권인 여성이 이곳에선 소외된다는 이야기다. 수적으로 열세이기도 하거니와 날개를 펴고 한껏 화려함을 뽐내는 '공작새 남자'를 이겨낼 방도가 없다. 게다가 평소 주변에서 옷 잘 입는 남자 찾기가 하늘에 별 따기라면 어디에 더 눈을 두겠나. 그러니 제아무리 옷 좀 입는 여자라 해도 피티워모에서만큼은 '시선의 역차별'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미국 패션 칼럼니스트 아리아나 레지오는 '스타일 포럼 저널'에 '여성으로서 피티 워모에 간다는 것'이라는 글을 올린 적이 있다. 그는 "(사업상 꼭 만나야 할) 바이어나 모델·사진가가 아니라면 Y염색체가 없는 이(여성)에게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그러면서 "더욱이 남자들 시선이 꽂힌 곳은 내 옷이 아니었다. 나의 목, 정확하게는 메고 있던 카메라였다"고도 했다. '이렇게 멋진 나를 빨리 찍지 않고 뭐 하냐'는 무언의 메시지였던 것이다. 
그런데 6월 13~16일에 열린 92회 피티워모에서 여성들의 반격 조짐이 감지됐다. '이래도 눈길을 안 줄테냐'는듯 비장의 카드를 내민 게 다름아닌 바지 정장, '슈트'다. 피티를 찾은 여성들은 남자들처럼 재킷과 바지를 짝지어 입는 건 기본이고, 베스트·모자·타이까지 곁들여 클래식 슈트의 모범답안을 제시했다. 아예 남녀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같은 디자인의 슈트 차림을 한 경우도 있었다.  
남성들과 다를 바 없는 클래식 슈트 차림을 한 여성. [사진 @itsmrkennedy]

남성들과 다를 바 없는 클래식 슈트 차림을 한 여성. [사진 @itsmrkennedy]

더블 버튼 베스트로 멋을 낸 여성 슈트. [사진 @estylr]

더블 버튼 베스트로 멋을 낸 여성 슈트. [사진 @estylr]

비슷한 슈트 차림을 하고 있는 남녀. [텀블러 hesbespokenher]  

비슷한 슈트 차림을 하고 있는 남녀. [텀블러 hesbespokenher]

머리부터 발끝까지 슈트 커플룩을 연출한 남녀. [사진 @therealsiyaka]

머리부터 발끝까지 슈트 커플룩을 연출한 남녀. [사진 @therealsiyaka]

정통파의 다른 한 편에선 '소프트 슈트'라는 변주도 생겨났다. 남자 슈트처럼 검정·감색이 아니라 핑크나 베이지 같은 연한 컬러를 내세우는가 하면, 꽃무늬 실크 소재를 활용한 슈트를 입었다. 또 재킷 안에 이너웨어를 입지 않아 자연스러운 노출을 노리는가 하면, 종아리 가운데까지 바지 길이를 줄여 발랄한 느낌을 연출했다. 여자의 슈트가 이토록 다양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한 수였다.  
클래식한 슈트에 핑크를 더한 모습. [사진 핀터레스트]

클래식한 슈트에 핑크를 더한 모습. [사진 핀터레스트]

동양적 느낌의 꽃무늬 쇼트 팬츠 슈트. [사진 @tommaso.regni]

동양적 느낌의 꽃무늬 쇼트 팬츠 슈트. [사진 @tommaso.regni]

'피티 돈나(여성)'들의 슈트가 시사하는 바는 뭘까. 바로 '다른 길'이다. 보통 여성이 이성 사이에서 옷차림으로 주목 받으려면 가장 쉬운 방식이 있다. 여성스러움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레드카펫 패션이 수차례 보여준 바, 노출이 될 수도 있고 몸의 실루엣을 강조하는 옷이기도 한다. 화려한 화장과 헤어스타일, 반짝거리는 액세서리로 치장하는 것도 필수다. 
이에 비해 슈트는 확실히 차별화한 시도다. 행사의 드레스 코드에 순응하는 '동질화'를 취하는 동시에 '슈트는 남자옷'이라는 고정관념을 깨는 '이질화'를 꾀하는 두 토끼 전략이기 때문이다. 
블라우스처럼 재킷을 제쳐 입은 스타일링이 돋보인다.[@patdomingo]

블라우스처럼 재킷을 제쳐 입은 스타일링이 돋보인다.[@patdomingo]

보우타이와 스니커즈로 포인트를 준 슈트 차림. [사진 @tommaso.regn]

보우타이와 스니커즈로 포인트를 준 슈트 차림. [사진@tommaso.regn]

회색톤으로 남녀가 분위기를 맞춘 모습. [사진 @sartorialist_prince]

회색톤으로 남녀가 분위기를 맞춘 모습. [사진 @sartorialist_prince]

흥미롭게도 이들의 모습은 '젠더리스(genderless·성별 구분이 모호해지는 현상)라는 최신 트렌드에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지금까지의 젠더리스는 여성복을 차용한 남성복이 표본으로 언급되곤 했다. 가령 구찌는 남성 컬렉션에 리본 장식 블라우스이나 꽃무늬 슈트를 등장시켰고, J.W.앤더슨 역시 미니 드레스와 오프 숄더 셔츠를 입은 남성 모델을 런웨이에 세운 바 있다. 윌 스미스의 아들이자 뮤지션·배우인 제이든 스미스는 2016년 봄여름 광고 캠페인에 치마를 입고 등장해 화제가 됐다. 스포트라이트를 받기에 충분한 파격이었다. 그에 비하면 지금까지 역방향의 시도는 딱히 눈에 띄는 게 없었던 게 사실이다. 피티 돈나의 슈트, 그 경계가 사라진 지는 오래됐으나 한쪽으로만 치우쳤던 젠더리스가 '쌍방향'으로 흐르는 작은 도전이라 여길 만하다. 
구찌의 2016 봄여름 남성복 컬렉션. [중앙포토]

구찌의 2016 봄여름 남성복 컬렉션. [중앙포토]

이들이 하고픈 말은 이런 게 아닐까. '멋쟁이 남자들을 두려워 말라. 핑크빛 블라우스를 입은 남자가 아름다운 것만큼, 슈트로 빼 입은 여자 역시 충분히 멋질 수 있으니.' 피티 돈나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이도은 기자 dangdo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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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은 이도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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