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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문재인 외교가 성공하는 길

중앙일보 2017.05.20 01:29
문정인연세대 명예특임 교수

문정인연세대 명예특임 교수

새 정부 출범 10일. 탄핵의 먹구름이 걷힌 5월의 하늘은 맑다. 상식과 소통이 배어 있는 취임사, 식판을 들고 직원들과 함께 순서를 기다리는 ‘보통사람’ 대통령, 5·18 기념사의 치유와 진정성까지 ‘제왕적 대통령’은 제도가 아니라 사람의 문제였음을 절감하기에 충분한 열흘이었다. 4강 특사외교 또한 인상적이다. 국정 지지율 87%라는 수치가 새삼스럽지 않은 이유다.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던가. 지난 14일 북한이 발사한 탄도미사일 화성-12형은 이를 되새기게 만든다. 다행히 청와대의 대응은 빠르고 정확했다. 미사일 발사를 강력히 규탄하는 한편 그 대응책으로 한국형 미사일방어 체계의 조기 구축과 한·미 공조 강화를 제시한 데서 문재인 정부의 강력한 안보의지가 읽힌다.
 
마음에 걸리는 부분은 따로 있다. 지난 16일 방한한 매슈 포틴저 미국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아시아 담당 선임보좌관과 합의한 “북한과의 대화는 올바른 여건이 이뤄지면 가능하다”는 대목이다. ‘올바른 여건’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 부분이 명확하지 않으면 코리아 패싱(Korea Passing)을 초래했던 ‘박근혜 트랩’이 재연될 수 있다. 우리 주도의 한반도 외교를 이끌겠다는 대통령의 구상에 부메랑으로 작용할까 우려되는 대목이다.
 
유감스럽게도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다. 북한의 조기 붕괴를 기대했던 지난 정부는 제재와 압박만으로 문제가 해결되리라고 믿었지만 결과는 허망했다. 시그프리드 헤커 스탠퍼드대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평양은 이제 매년 6기의 핵탄두를 생산할 수 있다. 지난 14일 발사시험이 강력히 시사하듯 미 본토를 타격하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도 멀지 않았다. ‘전략적 인내’는 더 이상 답일 수 없다.
 
‘올바른 여건’이 마련되기를 앉아서 기다릴 수만은 없는 건 이 때문이다. 북핵 해결의 주도권을 확보하려면 북한과의 선제적 대화가 중요하다. 물론 현시점에서 당국자 대화가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우회로를 통한 막후 접촉이나 민간단체의 물밑 교류를 통해 북한의 의도를 파악하고 조기에 당국 간 회담이 가동될 수 있도록 준비해 나가야 한다. 여기서 전제조건을 달 이유는 없고 미국의 동의도 불필요하다고 본다. 그리고 제한적이나마 개성공단 입주업체 관계자들이 현장을 일시 방문, 시설을 점검할 수 있도록 해 교류 협력의 물꼬도 터야 한다.
 
협상의 첫 번째 문을 여는 작업은 언제나 어렵다. 당연히 절체절명의 목표는 북한 비핵화다. 그러나 비핵화가 끝나야 대화할 수 있다는 자세로는 한 발짝도 나갈 수 없다. 핵을 최후의 보루로 믿는 평양이 스스로 이를 폐기할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제재와 압박으로 김정은의 마음을 뒤흔드는 동시에 ‘다른 길’을 보여 줘야 한다. ‘핵·미사일 개발 동결’을 협상의 입구로 삼고 ‘핵 폐기’를 그 출구로 설정해야 하는 이유다. 동결에서 폐기로 가는 과정과 관련해 2007년 2·13 합의의 3단계 방안, 즉 핵시설 폐쇄 봉인, 불능화, 검증 가능한 폐기라는 로드맵을 세심히 복기해 볼 필요가 있다.
 
가고자 하는 길이 명확해진 뒤에는 최대한 유연성을 발휘해야 한다. ‘도발에 대한 징벌’이라는 채찍은 ‘유연한 반대급부의 의제 설정’이란 당근과 함께해야 효과가 극대화되는 법이다. 문재인 대통령 본인이 대선기간 중 밝혔듯 북한의 핵·미사일 시험 유예와 한·미 합동군사연습의 규모 조정 또는 잠정 중단을 연계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의 병행 추진 역시 전향적으로 고려돼야 한다. 의제를 열어 놓고 전기를 마련하겠다는 탄력적 자세가 긴요하다는 뜻이다.
 
북핵 문제 25년은 우리에게 상상력과 결단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교훈을 뼈아프게 가르쳐 줬다. 그동안 우리는 너무도 쉽게 강대국 결정론에 빠져들었다. 지난 세기 겪었던 식민 지배와 전쟁, 분단은 모두 강대국 정치의 비극적 산물이었다. 한·미 동맹의 무게와 동북아의 지정학적 구도를 생각하면 주변국들의 영향을 차단하겠노라 선언하는 것이 만용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남북 관계를 한·미, 한·중 관계 위에 놓고 ‘한반도 외교의 한반도화’라는 발상의 전환을 하면 강대국 결정론을 넘어서는 길이 보일 것이다.
 
시민의 힘과 촛불의 기적. 그것을 한반도 평화를 만드는 원동력으로 승화시켜야 할 때다. 북핵 문제가 제아무리 난마처럼 얽혀 있다고 한들 우리 모두가 하나 되면 극복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이제 우리는 한반도와 동북아 외교의 중심에 서야 한다. 강대국 외교의 종속변수로 머물지 않으려면, 한반도의 미래가 발칸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북핵 문제 해결에서 우리가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 그게 문재인 외교를 성공으로 이끄는 길이다. 어느 때보다 따뜻한 5월, 다시 새로운 시작이다.
 
문정인 연세대 특임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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