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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할 타자라도 70~80%는 실패, 3085개 안타 쳤지만 즐거운 적 없어 … 다시 태어나면 야구하고 싶지 않다

중앙일보 2017.05.20 01:00
일본 불멸의 최다 안타 기록, 재일동포 야구 해설가 장훈
0.300 이상 16시즌 … 화상입은 오른손 때문에 왼손잡이로 개조한 뒤 피를 깎는 노력으로 전설의 반열에 오른 장훈, 하지만 그는 "다시 태어나면 야구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중앙포토]

0.300 이상 16시즌 … 화상입은 오른손 때문에 왼손잡이로 개조한 뒤 피를 깎는 노력으로 전설의 반열에 오른 장훈, 하지만 그는 "다시 태어나면 야구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중앙포토]

전설의 비밀은 손에 있었다. 악수를 한 오른 손바닥이 완전히 펴지지 않았다. 마주 앉았을 때는 테이블에 오른손을 올려두지 않았다. 일본 프로야구 불멸의 최다 안타(3085개) 기록을 세운 재일동포 장훈(張勳·77)은 야구 장애인이다. 1940년 히로시마(廣島)에서 태어난 그는 원래 오른손잡이였다. 네 살 겨울에 강둑에서 모닥불을 쬐던 중 후진하던 트럭을 피하려다 큰 화상을 입어 오른 약손가락과 새끼손가락이 눌어붙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야구를 시작하면서 완전히 왼손잡이로 개조했다. 공을 자유자재로 밀고 당겨치는 ‘광각(廣角) 타법’ ‘부채 타법’은 뼈를 깎는 노력의 산물이다.
재일동포 야구 해설가 장훈

재일동포 야구 해설가 장훈

 
그는 은퇴 후 처음으로 가와카미 데쓰하루(川上哲治) 전 요미우리 자이언츠 감독에게 오른손을 보여주었다. 일본 사상 첫 2000안타를 달성해 ‘타격의 신’으로 불린 가와카미는 “이런 손으로…”라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장훈은 히로시마 원자탄 피폭자로 큰누나를 잃기도 했다.
 
1980년 5월28일 롯데 오리온즈의 장훈이 한큐 브레이브스를 상대로 홈런을 치며 3000 안타의 위업을 달성할 때의 모습. [지지통신]

1980년 5월28일 롯데 오리온즈의 장훈이 한큐 브레이브스를상대로 홈런을 치며 3000 안타의 위업을 달성할 때의 모습.[지지통신]

장훈이 23년간의 현역 시절 남긴 기록은 헤아리기 어렵다. 통산 성적은 최다 안타와 504홈런, 타율 0.319, 도루 319개다. ‘3000안타, 500홈런, 도루 300개’도 그가 유일하다. 타율은 4000타수 이상일 땐 역대 3위지만 7000타수 이상에선 1위다. 수위 타자 7회는 동률 1위이고, 시즌 타율 0.300 이상 16회와 0.330 이상 11회도 일본 기록이다.
 
지난 8일 도쿄의 자택 부근 커피숍에서 만난 그는 희수(喜壽) 같지 않았다. 현역(키 1m81㎝, 몸무게 85kg) 시절이 무색한 탄탄한 몸매였다. 말은 빨랐고 거침이 없었다. 지금도 자신과의 싸움을 계속하는 듯했다.
 
“현역 시절 3085개의 안타를 쳤지만 단 한번도 즐거웠던 적이 없습니다. 필사적으로 쳤지요. 다시 태어나도 두 번 다시 야구 선수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되돌아보면 잘 해도 70~80%는 실패했으니까요. 23년간 괴로웠습니다.”
 
선수 시절 기억에 남는 장면이나 플레이부터 묻자 “그 순간뿐”이라며 엉뚱한 답을 했다. 당시 최대 라이벌이 누구냐는 질문엔 “나 자신이었다”고 말했다.
 
“사람은 누구나 편해지고 싶어 합니다. 잘 안 되면 술도 마시고 싶고 … 누구나 가정을 우선할지, 일을 우선할지 둘 중 하나를 택합니다. 좋은 남편, 아버지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아이들을 내버려두고 말이죠. 그렇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길 수 없습니다. 가정도, 야구도 잘하고 싶다고 모두들 생각하지만 양립은 쉽지 않습니다. 인간으로서, 스포츠맨으로서 이기고 싶지 않습니까. 자기 자신에게 지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연습벌레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만.
“매일 300개의 스윙 연습을 했습니다. 지금 선수들은 과거보다 5분의 1 정도밖에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한 번은 요미우리 구단 시절 오 사다하루(王貞治·77·통산 868홈런)와 함께 밤 11시30부터 새벽 4시까지 스윙 연습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서로 컨디션이 좋지 않았습니다. 물론 이렇게 해서 좋은 결과가 나올 까닭이 없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왜 쓰러질 때까지 그렇게 하느냐’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스스로 최면을 걸었습니다. ‘내가 못 칠 이유가 없다’ ‘오늘 못 치더라도 내일은 칠 수 있다’고 말이죠. 지금 되돌아보면 수십 회, 수백 회 실패했습니다. 술을 마시러 가서 후회한 적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하고 지금도 후회하고 있습니다. 지금 선수들은 너무 평화롭지요. 스포츠 선수에겐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연습입니다.”
 
재일 한국인의 차별 경험
고3 때 감독 탓 고시엔대회 못 나가
모국서 친선경기하며 민족의식 눈떠

매일 300개씩 스윙 연습
23년간 현역 시절 라이벌은 나 자신
요즘 선수들 과거처럼 연습 안 해

안타 신기록 깨질 가능성
오 사다하루 868개 홈런은 안 깨질 것
이치로 같은 선수 100년간 안 나와 
 
 
현역 시절 장훈과 어머니 박순분 여사. [중앙포토]

현역 시절 장훈과 어머니 박순분 여사. [중앙포토]

3085안타 기록은 깨지지 않을 것으로 보는지요.
“일본에서 저의 3085안타, 오 사다하루의 868홈런, 가네다 마사이치(金田正一·84·투수)의 400승은 아직 깨지지 않고 있습니다. 3명이 규이치카이(球一會) 모임을 했었는데 10년 정도 전부터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3085안타는 깨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868홈런 달성은 무리입니다. 400승은 깨지지 않을 것입니다. 현재 타자가 매우 유리하고 투수가 불리한 타고투저(打高投低) 때문입니다. 돔구장인 데다 인조잔디라서 공이 잘 튑니다. 투타의 이런 차이는 일본밖에 없습니다. 스포츠는 같은 조건에서 싸워야 합니다. 타자 유리의 스포츠는 비겁합니다.”
 
하지만 3000안타 기록도 좀처럼 깨지지 않을 것 같은데요.
“지금 일본 프로야구에선 2000안타가 고작입니다. 선수들이 노력이나 연습을 과거처럼 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조건이 좋으니 좋은 성적을 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오 사다하루는 연간 45개 전후의 홈런을 쳤는데 지금은 70개를 칠 수 있을 겁니다. 투수는 현재 15승 정도면 최다승이라고 하지만 예전에는 30승 정도였습니다.”
 
지금 선수로 뛴다면 어느 정도의 기록을 남겼을까요.
“0.400 정도는 쳤다고 생각합니다(장훈의 최고 타율은 1970년의 0.383이다). 안타 수는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자기 관리가 중요하니까요. 현재 조건이라면 타이틀은 모두 외국 선수에게 빼앗깁니다. 제 최고 타율 기록도 86년 한신 타이거스의 랜디 바스 선수(0.389)가 깼습니다. 일본에서는 외국 선수가 4명 출전 가능합니다. 한국에도 미국 선수가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양국 청소년의 꿈을 뺏는 것입니다. 한국과 일본의 프로야구 팬이 기뻐할 룰을 왜 안 만드는지 모르겠어요.”
 
스즈키 이치로 선수가 미·일 통산 4000안타를 돌파한 데 대해선 “앞으로 그런 안타 제조기는 100년간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저는 중거리, 홈런 타자이니 약간 다르다. 변명을 하면 홈런이 있으니까 힘을 넣어 치니 미스가 많다”고 설명했다. 장훈은 이치로가 메이저 리그에서 미·일 통산 3086개의 안타를 칠 당시 직접 참관하고 격려한 바 있다.
 
장훈은 재일 한국인으로서의 역경도 적잖았다. 58년 오사카(大阪) 나니와(浪華)상고 3학년 때 4번 타자로 지역별 예선 우승의 견인차였다. 당연히 전국고교야구선수권(고시엔대회)에 출전하게 돼 있었다. 하지만 대회 직전 야구부에서 일어난 폭력 사건에 연루돼 출전을 못했다. 장훈은 가담하지 않았는데도 누명을 썼다.
 
“당연히 재일 한국인에 대한 차별과 구별이 있었지요. 당시 감독이 팀을 살리고 저를 죽였습니다. 그래서 자살하려고 했습니다.”
 
2012년 2월 장훈이 일본 오키나와에서 전지훈련 중인 LG 트윈스 선수들에게 원포인트 레슨을 하고 있다. [중앙포토]

2012년 2월 장훈이 일본 오키나와에서 전지훈련 중인 LG 트윈스 선수들에게 원포인트 레슨을 하고 있다. [중앙포토]

실의에 빠진 그를 구한 것은 그해 한국에서 열린 한·일 친선고교야구였다. 고시엔대회에 나가지 못한 재일동포 고교생이 모국을 돌며 하는 경기였다.
 
“당시 김포공항에 도착했는데 학생 1000여 명이 양산도 아리랑을 불렀습니다. 가슴이 찡했습니다. ‘여기가 조부모, 부모가 자란 고향이었구나’ 하고 처음 민족의식에 눈을 떴습니다. 이때 조국에 대한 자신과 자부심을 갖게 됐습니다. 나중에 역도산(力道山·프로레슬러)을 비롯한 훌륭한 동포들을 만나 더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한반도 출신 남자가 그렇게 강하고 멋진 데 대해 동경했습니다.”
 
가정·야구 양립 쉽지 않아
야구 탓에 좋은 남편·아버지 못 돼
감독 하면 죽는다 어머니가 말려 거절

23년 동안 KBO 총재 특보
한국 프로야구 출범할 때 가장 기뻐
유망주 해외 진출, 외국 선수 규제해야 
 
 
장훈은 18세에 처음 역도산을 만났고, 야구 시즌이 아닐 땐 역도산 경기를 자주 보러 갔다. 역도산이 39세에 숨지면서 만난 기간은 3년 정도였다. 역도산은 신격호 전 롯데 회장 등 동갑인 재일동포 4명과 잘 어울렸다고 한다.
 
장훈은 81년 은퇴 후 이듬해 한국 프로야구 탄생과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82년부터 2005년까지 한국야구위원회(KBO) 총재 특보를 맡았다.
 
“은퇴 후 제일 목표는 한국 프로야구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KBO 이용일 초대 사무총장, 이호헌 사무차장과 더불어 프로야구를 만들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녔지요. 조국에 프로야구를 만드는 것은 꿈이었습니다. 마지막에 호남 연고인 해태가 구단 창립을 받아들이면서 6개 구단 체제로 출범하게 됐지요. 일본 프로야구 명예의 전당에 올랐을 때보다 더 기뻤습니다.”
 
한국 프로야구 초기 동포 선수들이 많이 활약했는데요.
“일본에서 장명부 투수를 비롯해 수십 명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재일동포를 ‘반 쪽바리’로 차별한다고 화를 낸 적이 있었습니다. 한 재일동포 선수가 타율 타이틀을 놓고 경쟁했는데 경기에 내보내지를 않아 KBO에 ‘그런 비겁한 짓을 하느냐’고 항의했습니다. 당시 재일동포 후배 선수가 ‘선배, 제 국적은 어디입니까. 한국도, 일본도 아니고, 동해입니까’라고 전화를 걸어왔을 때는 마음이 아파서 울기도 했습니다.”
 
한국 프로야구의 과제를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외국인 선수를 약간 규제해야 합니다. 우수 선수들이 일본과 미국에 가는 것도 막아야 합니다. 돌아오면 2년간 경기에 뛸 수 없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은 물론 일본·대만도 메이저리그에 우수 선수를 뺏기게 됩니다.”
 
은퇴 후 왜 감독을 맡지 않았는지 궁금합니다.
“일본에서 세 차례, 한국에서 한 차례 제안을 받았습니다. 롯데 신격호 오너한테는 ‘너 언제 일본 롯데 감독할 꺼냐’고 혼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스스로 감독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돌아가신 어머니도 아내에게 ‘절대로 감독을 시키지 말라’고 말렸습니다. 감독 맡으면 죽는다고…. 어머니는 지지 않으려고 하는 제 성격을 잘 아셨다고 생각합니다.”
 
장훈은 은퇴 이래 일본 민방 TBS와 스포츠지 스포츠닛폰의 야구 해설가를 맡고 있다. 주 1회 TBS의 ‘선데이 모닝’에 고정 출연한 지는 올해로 19년이 됐다. 선수들의 경기 내용에 관한 독설은 유명하다. 한 달에 1~2차례는 라디오 야구 해설도 하고 있다. 매일 아침 비가 오나 눈이 오나 7㎞를 걷는 것이 건강의 비결이라고 했다.
 
장훈(張勳·일본명 하리모토 이사오) 약력
1940년 히로시마현 출생
1958년 한·일 친선고교야구 출전
1959년 오사카 나니와상고 졸업
1959년 도에이 플라이어스 입단(신인왕)
1972년 2000안타 달성
1976년 요미우리 자이언츠 이적
1980년 롯데 오리온즈 이적. 3000안타, 500홈런 달성
1981년 은퇴
1982년~ TBS·스포츠닛폰 야구 해설가
1990년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
[S BOX] 일본 진출 1호 백인천 “장훈 선배 없었으면 성공 못했을 것”
 
일본 프로야구에 진출한 한국인 1호 타자는 백인천(74)이다. 경동고 시절 대형타자로 이름을 날린 백인천은 1962년 도에이(현 니혼햄)에 입단했다. 일본어도 못하는데다 팀원들의 따돌림을 받았던 그를 격려해준 사람이 바로 장훈이었다. 64년 백인천이 1군 데뷔전을 치를 때 사용한 헬멧과 배트도 장훈이 빌려준 것이었다. 백인천은 1975년 퍼시픽리그 타격왕에 오르는 등 19시즌 동안 통산 타율 0.278, 209 홈런을 기록했다. 그는 82년 프로야구가 출범하자 한국으로 돌아와 MBC 청룡(LG 전신)의 감독 겸 선수로 뛰었다. 백인천은 “장훈 선배가 없었다면 일본에서 성공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일본에 진출한 한국인 2호 타자는 ‘야구천재’ 이종범(47)이었다. 이종범은 97년 한국시리즈에서 해태를 우승으로 이끈 뒤 거액의 이적료(4억5000만 엔·약 50억원)를 해태에 안기고 주니치에 입단했다. 이종범은 98년 시즌 초반엔 좋은 활약을 보였지만 팔꿈치에 공을 맞은 이후 내리막을 걸었다. 몸쪽 공에 약점을 드러낸 이종범은 2001년 6월 친정팀 KIA에 돌아왔다.
 
2004년엔 한국 최고의 타자가 동해를 건넜다. 2003년 아시아 최다 홈런 기록을 세운 ‘국민타자’ 이승엽(41)이 이듬해 지바 롯데에 입단한 것이다. 이승엽은 2005년 30홈런을 터트리며 팀을 일본시리즈 정상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2006년엔 4년 30억 엔(300억원)이라는 초대형 계약을 맺고 요미우리로 이적했다. 일본 야구의 상징인 요미우리 4번타자가 된 이승엽은 41개의 홈런(2위)을 치며 맹활약했다. 그러나 이후엔 부진의 늪에 빠지면서 2012년 삼성으로 돌아왔다. 이병규(주니치)·김태균(지바 롯데)·이범호(소프트뱅크) 등도 일본에서 뛰었지만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다.  
 
한국인 타자 중 가장 꾸준했던 건 이대호(35·롯데)다. 이대호는 오릭스·소프트뱅크(2012~15년)에서 타율 0.293, 98 홈런·348 타점을 올렸다. 이 기간 동안 이대호보다 많은 홈런을 친 선수는 한 명도 없다. 2016년 메이저리그(시애틀) 도전에 나섰던 이대호는 올해 롯데로 컴백했다.
 
김효경 기자 kaypubb@joongang.co.kr
 
도쿄=오영환 특파원 hwas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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