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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만원으로 시작, 신화로 남은 대우 ‘세계경영’

중앙일보 2017.03.21 03:00
22일 대우그룹이 창립 50년을 맞는다. 대우경제연구소의 마지막 소장을 지낸 이한구 전 의원은 한 저서에서 “만약 정부가 대우의 위기극복과 과정을 지원했다면 대우의 세계 경영은 엄청난 빛을 발하고 있을 것”이라고 밝힌다. 하지만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한국 경제에 큰 부담을 안겼고, 이것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는 지적도 많다. 대우세계경영연구회의 미출간 『대우 30년사』와 ‘글로벌 청년사업가 양성사업 보고서’ 등을 통해 대우그룹의 중요한 장면 10개를 꼽아 봤다.
 
청년 김우중이 1967년 3월 22일 명동에 임대한 동남도서 빌딩 401호. 20평(66㎡) 짜리 사무실에서 자본금 500만원 직원 5명으로 대우실업을 시작했다. 현재는 재개발로 사라졌다. [사진 대우세계경영연구회]

청년 김우중이 1967년 3월 22일 명동에 임대한 동남도서 빌딩 401호. 20평(66㎡) 짜리 사무실에서 자본금 500만원 직원 5명으로 대우실업을 시작했다. 현재는재개발로 사라졌다.[사진 대우세계경영연구회]

① 20평서 직원 5명이 시작=1967년 3월 22일 중구 명동의 동남도서빌딩에 20여평의 작은 사무실이 차려진다. 31세의 청년 김우중과 동업자 도재환씨는 각 250만원씩 각출해 회사를 차렸다. 직원은 5명. 도재환씨가 운영하던 대도실업의 ‘대’자와 김우중의 ‘우’자를 따 지었다. 대우가 성장을 거듭하자 대우는 큰집 혹은 대우주라는 뜻이라는 해설이 나왔다. 원단 수출로 시작한 작은 무역 회사는 신성통상 등 몇개의 회사를 인수하면서 급성장한다. 그리고 6년 만인 73년 6월 11일 신문에 신주청약 안내 광고를 게재했다. 60만주 3억원 모집에 청약금 61억원이 몰렸다. 대우를 계기로 증권가에선 갑작스러운 기업 공개 붐이 일어났다.
 
② 32대1. 1974년 첫 그룹 공채=43명 모집에 1400명 응시. 대우 그룹의 첫 공채 모집 결과다. 80~90년대 가고 싶어 하는 기업 상위권을 차지했다. 대우는 한국 기업으로는 처음 기혼 여성 고용제도를 도입했다. 86년 대졸여사원 200명 모집에 5200명이 지원해 26대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93년 전국 순회 채용박람회, 인턴사원제도 역시 대우에서 시작했다. 대우에서 자란 인재들은 아직 한국 경제계에서 활약 중이다. 셀트리온의 서정진 회장도 그중 하나다. 대우차 임원을 지낸 서 회장은 대우 출신 후배들과 바이오 시장을 개척하고 있다. 하성용 한국항공우주산업(KAI) 사장은 대우중공업 출신이다. 건설과 증권 분야에서 아직 대우맨들의 파워는 남다르다.
 
③ 대우와 리비아=78년 대우는 수차례 두드려 굳게 닫혀있던 리비아의 문을 열었다. 한국 건설업체의 중동 진출은 사우디 아라비아에 집중돼 있었지만 대우는 리비아를 공략했다. 78~96년까지 리비아에서 80억 달러 규모의 공사를 수주했다. 인구 1000만 명의 리비아에서 주택 1만5000 세대를 지었고 전 국토의 도로를 깔았다. 리비아에서의 활약으로 81년 대우의 자본금은 638억원(당시 환율 기준 1억 달러)에 이르렀다. 세계 경영을 넘볼 수준으로 몸집이 불어난 것이다.
 
72년 11월 김우중 회장(오른쪽 사진 왼쪽)이 박정희 당시 대통령으로부터 금탑산업훈장을 받고 있다. [사진 대우세계경영연구회]

72년 11월 김우중 회장(오른쪽 사진 왼쪽)이 박정희 당시 대통령으로부터 금탑산업훈장을 받고 있다. [사진 대우세계경영연구회]

④ 세계 경영=396개. 98년 11월 대우의 해외 현지 법인 수다. ‘세계경영’은 93년 ‘세계경영 우리기술’ 슬로건 선포를 시점으로 본격화됐다. 세계경영은 선진업체가 진출하지 않은 옛 공산권 국가와 앞으로 발전가능성이 무한한 개발도상국 시장을 집중적으로 공략하는 것이었다.
 
⑤ 대우와 북한=1992년 2월 김우중 회장은 김일성 주석을 만나고 돌아온 뒤 “지구 상의 마지막 시장에 들어가기 위해 20여년간 꾸준히 준비해왔다”고 말했다. 김 회장은 북한이 공식 초청한 최초의 한국 기업인이다. 대우는 평양 인근에 남포공단을 조성하고 남북 경제 교류의 물꼬를 텄다.
 
⑥ 새한자동차 인수=78년 대우는 새한자동차를 인수하며 자동차 사업에 뛰어들었다. 92년엔 새한자동차의 GM 지분을 모두 인수하고 공격적으로 해외 거점을 마련했다. 르망이나 에스페로와 같은 차종은 중남미와 동구권 국가에서 ‘국민차’로 각광받았다. 현대차와 국내시장에서 쌍벽을 이룬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후일 대우자동차는 그룹의 아킬레스건이 돼 돌아왔다. 99년 그룹이 법정관리에 들어간 가장 큰 이유가 자동차 부문이 새 주인을 찾지 못해서다. 결국 2002년 대우 자동차 부문은 해체됐다.
 
⑦ 외환위기, 깨진 대마불사 원칙=경제위기 신호에도 대우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98년 1월 매물로 나온 쌍용자동차를 인수해 소형차에서 대형차, 버스와 트럭, 사륜구동 SUV 자동차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차량을 생산하겠다고 나선다. 하지만 부진이 계속됐다. 정부는 구조 조정에 소극적인 대우에 등을 돌렸다. 99년 3월께 대우그룹의 부채 비율이 자산의 400%를 넘기면서 수습이 어렵게 됐다. 7월 구조조정안을 발표했지만 채권단은 이를 거부한다. 결국 99년 8월 26일 법정관리에 들어가 그룹 해체 수순에 돌입한다. 큰 기업은 망하지 않는다는 대마불사(大馬不死)의 원칙이 깨진 첫 사례다.
 
⑧ 대우세계경영연구회= 대우맨들은 2009년 『대우는 왜』(북스코프)라는 책을 통해 “어느 날 당시에 구조조정을 총괄한 당국자가 일간지를 통해 대우가 시장의 신뢰를 잃어 해체됐다고 발언했다. 대우 임직원들이 그 기사를 보고 얼마나 비통했을까를 생각하니 너무나 마음이 아팠다”라고 밝혔다. 외환위기에 대한 입장과 철학이 정부와 달랐을 뿐, 대우가 틀린 것이 아니라고 항변한다. 이금화 대우 세계경제연구소 이사는 “이제는 털어내고 미래를 말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들이 현재 글로벌 청년사업가(GYBM) 육성 프로그램에 각별히 신경쓰는 이유다.
 
⑨ 김우중의 반격=김 회장은 2006년 분식 회계를 주도한 혐의로 징역 8년 6개월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2008년 특별 사면됐다. 추징금 17조923억원을 납부하지 않은 점은 여전히 논란이다. 2014년 8월 김우중 회장은 국내 무대로 돌아온다. 『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일은 많다』는 제목의 회고록은 작정하고 구조조정을 진행한 경제 관료들을 공격했다. 김대중 정부의 외환위기 극복 과정에서 국제 금융 자본 논리를 대변해 국내 산업 자본이 희생됐다는 게 요지다.
 
⑩ 50주년 기념식 혹은 18주기=22일 대우그룹 전직 임원 40여명은 창립기념일인 오후 서울 밀레니엄 힐튼 호텔에서 50주년 기념행사를 연다. 이 자리엔 김우중 회장 등이 참석할 예정이다. 
 
전영선 기자 azu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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