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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4차 산업혁명 시대, 바둑의 역할과 가치

중앙일보 2017.03.20 03:06
손종수세계사이버기원 상무·시인

손종수세계사이버기원 상무·시인

요즘 택시를 타면 가장 흔하게 듣는 말이 바닥에 이른 경기침체다. 거리를 달리며 실시간으로 서민 경제를 체크하는 택시기사들 에 의하면 지금의 경기침체가 1997년 이후 외환위기 시절보다 더 심각하다고 한다.
 
바둑계를 봐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시대의 요구에 따라 스포츠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바둑의 본질과 속성은 문화예술인데 경제가 어려워지면 가장 먼저 위축되는 분야가 바로 문화예술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오랫동안 우호적으로 이어져 온 기업의 바둑 후원이 속속 끊어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바둑계 인사들에게 가장 큰 충격을 안겨준 사건은 최고(最古)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던 국수전(國手戰) 프로바둑대회의 중단일 것이다.
 
기업이 어려우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인가. 꼭 그렇지는 않다. 한·중·일 3국의 승부 경쟁에서 밀려나 ‘현대 바둑의 메카’로서의 자존감을 잃은 일본이 국난이라 할 만한 극심한 불경기 속에서도 어땠는가. 요미우리신문의 기성전(棋聖戰) 등 신문 기보를 연재하는 공식 7대 기전을 꾸준히 존속시켜온 끈기와 저력에 우리는 관심을 가져야 한다. 국수전의 중단은 하나의 상징이다. 이미 수많은 바둑대회와 바둑 관련 행사가 사라지고 바둑 인구도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다. 과연 한국 바둑은 침체의 늪에서 빠져나와 재도약의 기회를 잡을 수 있을까.
 
기업의 외면으로 크게 위축된 한국 바둑은 지금, 국제 경쟁 무대에서 더 큰 위기에 봉착했다. 20년 가까이 누려온 바둑 세계 최강국의 위상은 이미 중국으로 넘어갔다. 중국 바둑의 발전은 철저하게 국가정책과 보폭을 맞춰왔다. 80년대 덩샤오핑(鄧小平) 시대에는 개혁·개방을 추진하면서 힘이 약할 때는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때를 기다리는 ‘도광양회(韜光養晦)’ 정책을 취했는데 중국 바둑이 그때 그랬다.
 
급속한 경제 발전을 통해 힘이 축적된 후진타오(胡錦濤) 시대에는 세계 평화를 지지하면서 대국으로 발전하겠다는 ‘화평굴기(和平?起)’ 정책을 펼쳤다. 2000년대 초반부터 적극적 관여와 개입 전략으로 국제 관계에서 중국의 역할을 강조하고 국익을 확대하는 ‘유소작위(有所作爲)’ 정책으로 전환했다. 현재 중국 바둑의 정책이 그와 꼭 같다. 사실 인구 15억의 중국 국력을 생각하면 5000만 명인 우리나라가 얼마 전까지 누려온 세계 최강국 20년의 기록은 기적에 가깝다.
 
그렇다면 우리는 한국 바둑의 쇠락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이 나라에서 바둑의 가치는 그 정도에 불과한 걸까. 그렇지 않다고 본다. 지금까지 바둑은 일개 예도(禮道)나 마인드 스포츠 이상의 가치와 역할로 대한민국 사회에 기여해왔다.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국민에게 역경 극복의 의지와 자신감을 일으켜 세우는 동력이 돼 왔다. 80년 조치훈의 일본 명인 쟁취, 89년 조훈현의 잉씨배 우승, 그 뒤로 이어진 이창호·이세돌 바둑 천재들의 세계제패 등이 그것이다. 단순히 한 종목의 타이틀 획득 정도로 생각한 국민은 없다. 바둑 국가대표의 2010년 중국 광저우 아시안게임 금메달 석권은, 척박한 토양에서 태어나 각고의 노력으로 국가의 위상을 드높이고 국민에게 큰 자부심을 안겨준 올림픽 스타들의 공로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승부 경쟁에서 오래전부터 한국과 중국에 뒤진 일본이 왜 7대 공식 프로기전을 유지해 꾸준히 바둑문화에 투자하고 있는지, 트럼프의 미국과 새로운 패권다툼에 여념이 없는 중국이 왜 바둑문화 발전을 국가정책에 포함시켰는지 연구 분석해야 한다.
 
인공지능 ‘알파고’의 등장은 인간 고유의 최고 게임 영역으로 간주된 바둑에서 인간을 압도해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알파고 충격은 급변하는 시대의 상징이며 퇴락과 재도약 기로에 선 한국 바둑에 던지는 거대한 물음표다. 어떻게 할 것인가.
 
위기는 위험과 기회라는 동전의 양면이다. 사물인터넷·인공지능·생명과학이 주도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도래는 한국 바둑이 맞은 새로운 지평선이다. 승부 지상주의에 매몰된 바둑의 새로운 시대를 한국이 열어갈 절호의 기회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한국기원이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와 손잡고 바둑교육 활성화사업 공동협력에 합의한 사실에 주목한다. 바둑 저변 확대라는 1차적 목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문화예술로서 바둑 외연을 확장하는 일이 될 것이다.
 
바둑은 단순한 승부게임이 아니다. 세상 어떤 스포츠, 어떤 승부에서 승자와 패자가 머리를 맞대고 최선의 결과를 찾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 바둑이 유일하다. 바둑은 성찰과 소통과 화합을 이끄는 정신의 영역이다. 거기에 이 사회에 기여할 바둑의 공익적 가치와 역할이 존재한다.
 
“인류의 미래는 생물학적 진화보다 문화적 진화의 형태로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 말은 바둑에 꼭 맞는다. 한국 현대 바둑 70여 년을 이끌어온 한국기원과 유관 단체의 분발을 기대한다. 한국 바둑에 혁명이 필요하다. 종전 생각을 전복하지 않는 혁명은 없다.
 
손종수 세계사이버기원 상무·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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