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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깨도 볶고 커피도 볶는 ‘투잡 방앗간’ 사장님

중앙일보 2017.01.14 00:45
서울 길동서 26년째 ‘기름집’ 육근목씨
가게 한 켠에 있는 볶음 기계에 연초록색 생두를 부었다. 조작기에서 온도 레버를 100도로 맞추자 지름 70㎝, 깊이 30㎝ 볶음 기계가 천천히 돌아갔다. 볶음 기계는 원통을 눕혀 놓은 것처럼 생겼다. 잠시 뒤 온도를 150도로 올렸다. 15분쯤 지났을까. “타닥, 타닥” 소리와 함께 생두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 온도가 되면 생두 튀는 소리가 나요. 이렇게 갈라지면 잘 볶아지고 있는 겁니다.”

180도를 거쳐 200도까지 올린 후에야 기계는 섰다. 연초록색이던 생두는 30분 만에 짙은 갈색의 원두로 바뀌어 있었다. 코끝으로 구수하면서 쌉싸래한 커피향이 풍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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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시장서 30여 년 ‘곡물 볶기 달인’
국민학교 1학년 때 방앗간 운영 꿈
80년대엔 철제 돈통에 돈 가득 벌어
서울 길동 복조리시장의 성창기름집 육근목 사장이 자신이 직접 볶은 원두와 커피를 들고 서 있다. 육 사장 뒤로 보이는 가게는 그가 26년간 운영한 방앗간이자 커피 로스팅 가게다. 참깨·들깨를 주로 볶아 온 그는 지난해부터 커피 원두도 볶는다. [사진 장진영 기자]

서울 길동 복조리시장의 성창기름집 육근목 사장이 자신이 직접 볶은 원두와 커피를 들고 서 있다. 육 사장 뒤로 보이는 가게는 그가 26년간 운영한 방앗간이자 커피 로스팅 가게다. 참깨·들깨를 주로 볶아 온 그는 지난해부터 커피 원두도 볶는다. [사진 장진영 기자]

서울 강동구 길동 복조리시장의 ‘성창기름집’. 올해 예순넷의 육근목 사장에게선 참기름 냄새 대신 원두커피 향이 풍겼다. 참깨·들깨를 볶아 기름을 짜내던 육 사장의 가게는 요즘 ‘커피 볶는 방앗간’으로 불린다. 지난해 커피 로스팅을 시작하면서다. 30여 년 기름 짜는 인생에 커피라는 인연을 얹어준 사람은 둘이다. 한 명은 김승일 서울시 서울형 신시장 모델 육성사업단장이다. 늙어가는 재래시장을 살리는 게 업무였던 김 단장은 지난해 초 육 사장에게 넌지시 커피 로스팅을 권했다.

“전통시장은 주로 식자재 관련 물건을 파는 곳입니다. 그런데 소비자 패턴이 바뀌었잖아요. 전통시장이 살려면 젊은 사람들이 시장에 몰려와야 합니다. 그래서 커피 로스팅을 해 보시는 게 어떠냐고 말씀드렸죠.”

바리스타 자격증 며느리가 도와줘
서울 신시장 사업단장이 로스팅 권유
방앗간서 볶아도 커피 향 영향 없어

비슷한 고민을 하던 육 사장은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고 한다. 강력한 후원자 덕분이었다. 첫째 며느리인 강민현(31)씨가 주인공이다. 강씨는 직장인이지만 바리스타 자격증을 지닌 커피 전문가이기도 했다. 며느리 강씨는 “한번 해 보세요”라며 시아버지를 응원했다. 기름집이 커피 로스팅 가게로 ‘투잡’을 뛰게 된 사연의 출발은 그랬다.

육 사장의 인생은 볶는 일과 뗄래야 뗄 수 없다. 경북 상주에서 태어난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가족들과 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열한 살 터울 친형이 하는 고추방앗간이 첫 직장이었다. 스무 살부터 일했고, 군대를 다녀온 뒤 결혼해 가정도 이뤘다. 쉴 틈 없이 그는 형의 방앗간에서 일했다. 그렇게 9년간 참깨를 볶고 기름을 짠 기술로 자기 가게를 차렸다. 1982년 강동구 천호시장에서 참기름·들기름 가게를 냈다. 당시를 회상하는 육 사장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땐 오전 5~6시부터 손님이 몰려 들었습니다. 오전 9시가 되기도 전에 철로 만든 돈통에 돈이 가득했죠.” 그렇게 해서 천호동에 50평형대 아파트를 샀다. 호황은 85년 가락시장이 생기면서 주춤했다. 88년 송파구 마천시장으로 옮겨 방앗간을 겸한 떡집을 했다. 장사는 잘 됐지만 부인의 건강에 적신호가 켜졌다. 떡 주문이 들어오면 새벽에도 일을 해대다 보니 갑상샘암 초기 진단을 받았다. 떡집 문을 닫았다. “돈도 좋지만 아내한테 너무 미안했어요. 욕심 내서 하지 말고 원래 하던 일만 하자는 마음으로 가게 문을 닫은 거죠.” 그는 덤덤하게 말했다.

91년 지금의 길동 복조리시장에 터를 잡았다. 하지만 방앗간 일은 손에서 놓지 않았다. 방앗간이 꿈이었고 삶이었다. 두 아들을 대학까지 보낼 수 있었던 것도 방앗간 때문에 가능했다고 그는 힘주어 말했다.

“어렸을 때도 고향 동네 어귀에 있던 정미소가 그렇게 좋아 보였어요. 국민학교(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동네 어른이나 선생님들이 꿈이 뭐냐고 물으면 ‘방앗간 사장을 하겠다’고 말했다니깐. 허허.”

육 사장은 커피를 참깨·들깨 등의 곡물을 볶는 볶음 기계로 볶는다. 로스팅의 생명은 온도다. “볶음 기계를 2015년에 400만원을 주고 샀습니다. 요놈이 아주 대단한 역할을 했죠. 온도를 맞춰 놓고 볶으니 크게 어렵지 않더라고요.”

‘볶는 일’에는 도사였지만 미세한 커피 맛을 잡아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커피의 맛과 향을 잡는 일에는 며느리가 선생님이 됐다. 커피 로스팅을 배우기 시작한 뒤 그는 거의 매일 자신이 볶은 원두를 며느리 집에 가져가 평가를 받았다. “아버님, 이건 조금 떫네요” “이건 조금 써요”라는 잔소리 같은 쓴소리를 한 달 가까이 들은 끝에 로스팅하는 적정 시간과 온도를 알게 됐다. “떫으면 원두를 덜 볶았다는 의미고, 쓰면 너무 볶았다는 의미였죠. 생두 종류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며느리 덕분에 종류별로 로스팅하는 미세한 차이를 알 수 있게 됐죠. 요즘에 저는 커피믹스를 안 마셔요. 이때 아메리카노의 개운한 맛을 알게 됐죠. 물론 단 걸 좋아해서 설탕은 넣지만요.”

전통시장 활기 되찾는 데 큰 도움
시식 후 30대 아줌마들 자주 찾아와
시장 살리려면 특화 상품 개발해야
갓 볶은 커피 원두를 채에 고르게 펴서 식히면서 원두 향을 맡고 있는 육 사장. [사진 장진영 기자]

갓 볶은 커피 원두를 채에 고르게 펴서 식히면서 원두 향을 맡고 있는 육 사장. [사진 장진영 기자]

커피 맛에도 자신감이 붙기 시작하자 지난해 6, 7월 마지막 주 주말에 육 사장은 볶은 원두로 만든 커피 무료 시음회를 열었다. 당시 시장을 찾은 주민들이 줄을 설 정도로 인기를 모았다고 한다. 그 뒤론 로스팅한 페루 카투라(100g당 5000원), 탄자니아 아라비카(4000원), 베트남 로부스타(3000원) 등을 팔았다. 육 사장은 “시음 행사를 할 때 손님들이 방앗간에서 커피 로스팅을 한다고 하니 매우 신기해했다. 다들 맛있다며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후에는 30대 엄마들이 ‘그때 마셨던 그 커피(원두)를 달라’면서 자주 찾아오곤 했다”고 말했다.

요즘에는 생두를 로스팅해 팔지 않고 손님이 생두를 가져오면 로스팅만 해준다. 육 사장은 “아무래도 원두를 가는 ‘그라인더’가 있는 가정이 많지 않다 보니 손님도 뜸해졌어요. 일단 로스팅을 하면 오래 보관할 수 없으니 지금은 볶아주기만 합니다”고 설명했다. 커피 생두의 경우 1~2㎏ 볶는 데 5000원, 5㎏은 1만원을 받는다. 참깨·들깨 등 다른 곡물과 가격은 별 차이 없다. 그의 가게 매출에서 커피 로스팅은 전체의 10%가 채 안 된다.

하지만 육 사장에게 커피 로스팅은 단순한 매출 이상이다. 평생 시장에서 배운 노하우가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라는 자부심이다. 육 사장은 그가 새로운 사업 분야에 뛰어든 것처럼 상인들이 분발하면 전통시장도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믿는다.

“대형마트가 생기면서 전반적으로 전통시장 상권이 죽은 게 사실이잖아요. 또 예전에는 집에서 자녀들 점심 도시락을 쌌는데 이제는 학교급식을 하니 새벽같이 시장에 와 반찬 재료를 사던 주부들이 사라지기도 했고요. 그래서 그때는 새벽 장사가 꽤 잘됐던 거죠. 그렇다고 예전엔 그랬지 하며 가만히 있으면 되나요. 시장을 살려야죠. 상인 몇 명만이라도 그 시장에서만 살 수 있는 새로운 상품을 개발하면 손님들은 늘 찾아옵니다. 기회는 늘 잡는 사람의 것이죠.”

‘커피 볶는 방앗간’의 육 사장은 오늘도 커피를 볶는다.
 
[S BOX] 울금 추로스, 코다리 강정…이색 상품으로 고객 잡는 전통시장
전통시장 하면 흔히들 대형마트에 비해 상품 구색이 다양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최근엔 개성 있는 상품으로 고객몰이에 성공하는 전통시장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시장에 청년상인들의 아이디어가 스며들면서 참신한 상점이 늘고 있다. 서울 구로구 구로시장의 청년상인들이 모여 있는 ‘영프라쟈’에 입점한 ‘흑심’은 만들어진 지 30~50년 된 빈티지 연필을 비롯해 세계 각국의 연필을 전문으로 파는 연필 편집숍이다. 가장 비싼 연필은 황동으로 만들어진 연필로 판매가는 한 자루당 2만2000원이다. 인근 ‘추억점빵’에선 설탕으로 만든 달고나와 전자오락기 체험 등이 가능하다. 마징가와 건담을 비롯한 다양한 옛 장난감들도 판매한다.

성북구 정릉시장의 ‘땡스롤리’는 수제 캐러멜과 사탕이 주력 제품이다. ‘내 아이가 먹어도 좋은 간식’을 목표로 하는 만큼 건강한 식재료로 만드는 게 특징이다. 방부제를 비롯한 합성첨가물을 하나도 넣지 않는다. 도봉구 방학동 도깨비시장의 ‘꽃보다 츄러스’에선 국산 울금을 넣은 추로스를 판매한다. 울금은 소화장애 개선은 물론 암 예방 효과까지 있는 수퍼 푸드로 유명하다. 추로스의 달콤함과 인기 건강식품이 상인의 아이디어로 만났다. 추로스 안에 소시지를 넣은 핫도그 추로스도 있다. 인근의 창동골목시장의 대표 선수는 고혈압과 심장에 좋은 아로니아를 넣어 만든 칼국수와 잼, 빵, 떡이다.

관악구 신림동 신원시장의 주무기는 닭강정과 수제 과일잼이다. 다른 지역에서 맛볼 수 없는 더덕김밥과 순대도 인기다. 강동구 명일동 명일시장의 주력 상품은 코다리 강정이다. 명일시장에선 코다리를 오리지널과 양념, 매운맛 등 세 가지로 요리해 판다. 치킨과 비슷한 포장용기를 활용해 주로 반찬으로만 먹던 코다리를 술안주나 어린이 간식으로 탈바꿈시켰다. 이수기 기자

글=조한대 기자 cho.handae@joongang.co.kr
사진=장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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