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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속으로] 유엔보다 센 축구의 힘…‘국제분쟁 해결사’ FIFA

중앙일보 2017.01.14 00:39
FIFA서 이스라엘 제재 논의한 까닭
지난 9~10일 스위스 취리히에서 열린 국제축구연맹(FIFA) 평의회에서 2026년부터 월드컵 본선 진출국을 32개국에서 48개국으로 늘리는 안이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지난해 2월 취임한 잔니 인판티노 FIFA 회장의 공약이었던 대회 확대는 전 세계에 속보로 타전됐다. 이 뉴스에 가려졌지만 이번 평의회에선 또 하나의 주요 안건이 다뤄졌다. 인판티노 회장이 취임 당시 “우선순위에 두겠다”고 선언한 해묵은 숙제이기도 하다. 축구와는 전혀 무관해 보이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이 그것이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자치령에 정착촌을 건설해 유대인을 이주시키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밀어냈다. 1967년 제3차 중동전쟁에서 압승한 뒤엔 강제 점령한 서안지구와 동예루살렘에 집중적으로 정착촌을 지었다. 유대인 약 60만 명이 정착촌에 거주 중이다. 이스라엘은 또 테러 위협을 핑계로 분리장벽을 세워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고립시키고 있다. 국제법상 점유 영토에 자국민 정착촌을 짓는 것은 불법이다.

유대인 정착촌엔 이스라엘 축구팀도 있다.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HRW)에 따르면 서안지구 등에서 6개 팀이 활동 중이다. 이 역시 국제사회 규칙에 어긋난다. FIFA가 ‘회원국과 회원국의 팀은 합의·승인 없이 타국 영토에서 활동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이 인정하지 않는 이스라엘의 정착촌 축구팀은 규정 위반인 셈이다. HRW는 “훔친 남의 땅에서 치러지는 경기는 축구의 아름다움을 더럽힌다”고 주장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측은 수년 전부터 이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FIFA에 요구했다. 정착촌 축구팀에 연고 이전을 명령하거나 출전 금지 등 제재 조치를 취해 달라는 것이다. 지난해 5·10월 열린 FIFA 회의에서도 이 안건이 올랐다. 그러나 FIFA는 스포츠와 정치는 별개라는 명분으로 주저하면서 결정을 미뤘다.

그런데 지난해 말 반전의 계기가 생겼다. 12월 23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이스라엘의 정착촌 건설 중단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한 것이다. 79년 이후 유엔이 처음으로 채택한 이스라엘 비판 결의안이었다. 결의안은 이스라엘의 정착촌 건설을 명백한 국제법 위반으로 적시했다. 이스라엘의 뼈아픈 외교적 패배라는 분석이 나왔다. 그러나 한편에선 허울만 좋다는 지적이 나온다. 결의안에 강제 조치가 없기 때문이다. 선언적·상징적 의미가 있을 뿐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유엔 역할의 한계만 드러냈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스라엘은 강력 반발하며 유엔 분담금 삭감·폐지라는 보복 카드까지 꺼내 들었다.

그러자 국제사회의 압박이 FIFA로 향했다. 지난해 12월 29일 AFP통신은 “유엔이 명백하게 팔레스타인 영토라고 선언한 지역을 FIFA는 분쟁 지역으로 여기고 있다”고 지적하며 “유엔의 결의안 채택으로 FIFA가 정착촌 문제와 관련해 이스라엘에 단호한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요구가 커졌다”고 보도했다.
어쩌다 FIFA는 국제분쟁 해결사 역할을 요구받게 됐을까. 스포츠와 정치는 별개라지만 스포츠는 정치에 이용되곤 했다. 체제 선전에 스포츠만큼 효과적인 것이 없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베니토 무솔리니가 주최한 제2회 이탈리아 월드컵이었다. 그는 이탈리아의 위대함을 과시하기 위해 브라질·아르헨티나를 탈락시키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일부러 선수단의 숙소를 경기장에서 멀리 떨어뜨려 놓는 식이었다. 스포츠의 후광으로 체제 논리의 빈틈을 메워 보려 한 것이다.

오늘날에도 스포츠는 정치적 역할을 한다. 지난 7일 알자지라 칼럼은 이른바 ‘문제 국가’들이 스포츠를 활용해 ‘보통 국가’인 척한다고 지적했다. 칼럼은 “이스라엘이 국제대회 참가를 통해 이미지를 세탁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스라엘이 유엔 안보리 결의안 채택에 강력 항의한 것도 국제적 평판과 이미지 훼손을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따라서 스포츠를 통한 이미지 세탁의 기회를 아예 차단해 버리는 것이야말로 실질적으로 체제를 고립시키고 압박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제재라는 주장이다. 칼럼은 “FIFA의 결단은 이스라엘의 불법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분명한 경고이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축구 제재’는 이스라엘 내부를 흔들 수도 있다. 이스라엘은 유럽축구연맹(UEFA) 소속이다. 이스라엘 프로 리그의 상위팀은 유로파 리그에 출전한다. FIFA의 제재로 이스라엘팀의 리그 출전이 막히고 축구팬들이 실망한다면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 등 이스라엘 정치인들이 선거 국면에서 후폭풍에 휘말릴 수도 있는 것이다. 팔레스타인이 이스라엘을 제재하라고 FIFA에 반복해 요구하는 까닭이다. 2014·2015년에도 팔레스타인축구협회(PFA)는 이스라엘의 자격정지와 제명을 FIFA에 요구했다. 막판에 이 요구를 철회했지만 팔레스타인은 끈질긴 노력 덕분에 FIFA 안에 이·팔 관련 감시기구를 설치하는 성과를 거뒀다.

FIFA가 전 세계를 뒤흔든 국제분쟁에 개입한 사례가 있다. 대표적 사례가 남아프리카공화국이다. 아파르트헤이트(극단적인 인종분리정책)를 법제화한 남아공은 58년 백인으로만 구성된 남아공축구협회(FASA)로 FIFA에 가입했다. 그러나 FIFA의 반(反)차별 규정에 따라 제재와 제재 해제를 거듭하다 64년 자격정지 처분을 받았다. 76년엔 150여 명이 희생된 흑인학생들의 대규모 시위 ‘소웨토 항쟁’으로 제명돼 완전 축출됐다. 흑백 통합리그 출범, 넬슨 만델라 석방, 아파르트헤이트 폐지 후인 92년에야 남아공은 FIFA에 재가입할 수 있었다.

2014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해 크림반도를 강제 병합했을 때도 축구가 제재 수단이 됐다. 크림반도에서 활동하는 축구팀을 러시아 리그에 흡수시키려는 시도를 무력화한 것이다. 당시 국제사회는 러시아의 침공을 비난하는 여론으로 들끓었고 미국과 유럽연합(EU)이 대러 경제제재에 착수했다. 러시아로부터 2018년 월드컵 개최권을 박탈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우크라이나 축구협회는 FIFA와 UEFA에 러시아를 제재하라고 요구했다. 결국 UEFA는 러시아 리그의 흡수 시도와 크림반도 축구팀의 국제대회 참가를 금지했다. 이런 조치는 러시아를 충격에 빠뜨렸다. 뉴욕타임스(NYT)는 “고위급 러시아 축구 관계자가 ‘UEFA의 조치가 월드컵 개최권 박탈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며 공황상태에 빠져 통화하는 녹취가 공개됐다”고 보도했다. 끝내 크림반도 축구팀은 러시아 리그에 흡수되지 못했다. 대신 FIFA는 이 지역을 특수지역으로 규정하고 자체 리그를 출범시켰다.

팔레스타인도 정착촌팀에 크림반도식 해법을 적용하라고 FIFA에 요구하고 있다. 정착촌팀의 이스라엘 리그 출전을 금지하고 자체 리그를 만들라는 것이다.

이처럼 정치와 스포츠를 구분하지 말라는 요구가 FIFA에 끊임없이 쏟아지고 있지만 이번 평의회에서도 이·팔 문제는 결론이 나지 않았다. 인판티노 회장은 “결정된 것이 없다”며 안건을 또다시 미뤘다.
 
[S BOX] 유엔 가입 193개국, FIFA 회원은 211개국
유엔 가입은 주권국가로서 국제사회에서 인정받는다는 의미다. 현재 유엔 가입국은 193개다. FIFA 회원국은 211개다. FIFA 회원국이 더 많은 것은 신생국가나 독립을 모색하는 지역이 유엔에 앞서 FIFA의 문을 두드리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이나 지난해 5월 가입 승인을 받은 코소보 등이 해당한다. 한 국가지만 다른 정체성을 가진 경우 FIFA 안에서나마 ‘독립성’을 인정받기도 한다. 잉글랜드·웨일스·스코틀랜드·북아일랜드로 따로 가입한 영국이 그 예다. 국제사회 질서와 무관하게 통하는 ‘축구 주권’이 있는 셈이다. FIFA의 권력이 얼마나 센지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특정 국가나 지역의 FIFA 가입을 저지하려는 시도도 이뤄진다. 2008년 독립 선언 직후 가입을 신청한 코소보가 8년이나 걸려 FIFA 회원국이 된 것도 세르비아의 강력한 반대 탓이었다. 코소보는 독립을 위해 1990년대 말 발칸반도를 피로 물들이며 세르비아와 충돌했다.

역시 지난해 가입한 지브롤터도 스페인의 반대를 겪었다. 애초 스페인령이었던 지브롤터는 18세기 초 영국이 점령한 이후 자치권을 인정받고 있다. 스페인이 지브롤터 가입을 반대한 것은 카탈루냐와 바스크에 미칠 영향을 우려해서다. 카탈루냐와 바스크는 스페인에서 독립하기를 원한다. 이들은 각자의 축구협회를 운영하며 국가대표팀과 친선경기도 치른다. 영국을 예로 들며 단독 가입시켜 달라고 FIFA를 끊임없이 설득한다. 스페인이 UEFA에 탈퇴 협박까지 하면서 지브롤터의 가입을 막았던 이유다.

홍주희 기자 hongh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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