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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문영의 호모디지쿠스] 기승전X·갑툭튀…순서 상관없는, 산만한 랜덤 액세스 세상

중앙일보 2017.01.14 00:27
디지털 이전은 순서의 시대였다. 타자기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순서대로 쓰고, 영사기는 필름을 앞에서 뒤로 돌리며 영화를 보여줬다. 이야기의 기승전결 구조는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사람들은 책을 사면 앞장에서 뒷장으로 넘기며 읽었다. 아이들은 자라서 어른이 됐고 어른들은 늙어서 노인이 됐다. 신입사원은 시간이 지나면 과장이 되고 부장이 됐다. 순서에 따르는 것이 순리(順理)였다.

디지털 이후의 시대는 달라졌다. 글을 쓰다 뒤에서 잘라 앞에다 붙이기도 하고, 중간에 끼워 넣기도 한다. 워드프로세서가 그것을 가능하게 해줬다. 인터넷에서 글을 읽다가 손바닥 아이콘이 나오면 간혹 원래 읽었던 글과 상관없는 삼천포로 빠지기도 한다. 어릴 때부터 이미 스타가 돼서 어른처럼 돈 버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어른이 됐다가 애 같은 취미에 빠져 다시 아이가 된 키덜트(Kidult) 어른도 있다. 앞으로 아이라는 표현을 쓸 때는 괄호 안에 5세인지, 40세인지 써줘야 할지도 모른다.

인터넷에서 영화나 드라마를 순서대로 집중해서 보는 것을 ‘정주행’이라고 한다. 반듯하게 운전하듯이 해낸다는 뜻이다. 과거 흥행에 성공한 영화는 1편에 이어 2편, 3편이 순서대로 나왔다. 하지만 ‘스타워즈’ 같은 작품은 아예 에피소드4부터 파격적으로 시작하더니 요즘 수퍼 히어로 영화들은 이야기의 그 이전을 다루는 프리퀄, 이야기의 곁가지인 스핀오프 같은 형식들이 쏟아져 어디가 이야기의 시작이고 끝인지를 알 수 없게 한다.

순서대로 하지 않고 필요에 따라 언제든지 같은 시간에 접근할 수 있는 것. 랜덤 액세스(Random Access: 임의 접근)는 디지털의 중요한 특징이다. 순서가 상관없다 보니 나타난 현상 중 하나가 동시에 하는 일이 많아진 것이다. 동시처리작업(Multi Tasking)이다. 그래서 효율은 높아졌지만, 세상은 참 산만하다.

휴대전화를 옆에 둔 학생이 공부하는 것을 지켜본 엄마들이라면 알 것이다. 얼마나 산만한지…. 아이들은 공부도 하고 메시지도 주고받으며 음악도 듣는다. 엄마들 속이 터진다. 그런데 그러는 엄마들도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드라마를 보다가 주인공을 검색하고 드라마 속 상품을 친구에게 메시지로 보낸다. 드라마 보는 눈과 귀보다 어쩌면 손가락이 더 바쁘다. 요즘 유행하는 인터넷TV에서는 시청자가 출연자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원하는 동작을 요구한다. 거의 채팅 서비스에 가깝다.

이렇게 산만하다 보니 결론이 엉뚱한 데로 튀기도 한다. 기승전[X]라는 말이 있는데, ‘잘나가다가 엉뚱한 데로 흐른다’는 뜻이다. 가끔 특정한 결론으로만 유도한다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기승전-치킨’이라고 하면 무슨 이야기든 결국 치킨으로 결론을 내는 것을 말한다.

‘갑툭튀’라는 말도 있는데 갑자기 툭 튀어나왔다는 뜻이다. 『입이 튀어나온 ‘입툭튀’는 별개』. 입툭튀가 왜 갑툭튀처럼 나왔느냐고? 이렇게 독백처럼 쓸데없는 말을 끼워 넣는 것이 유행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다. 예를 들어 앞의 ‘갑툭튀’를 설명하다가 굳이 안 써도 될 헛소리, 잡담을 취소선을 이용해 덧붙여 준다. 다소 장난스러운 이런 글쓰기는 글의 쓸데없이 무거운 긴장을 해소하고 여유를 주기도 한다.

순서를 무시하는 디지털 시대에는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미래에 과도한 의미를 두지 않는다. 그저 현실을 즐길 뿐이다. ‘순서대로’ 시대에는 현재가 과거의 산물이었고 원인과 결과라는 엄격한 관계 속에 갇혀 있었다. 하지만 ‘임의접근’ 시대에는 과거와 미래가 현재와 동격이다. 현재와 과거는 특별한 관계가 아니라 각각 별개다. 마찬가지로 미래와 현실 관계도 같다. 그것은 현실이 참담하다고 미래를 비관하거나 현실이 장밋빛이라고 미래를 낙관할 이유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수직적, 순서적 삶에 익숙한 기성세대는 이런 디지털 시대가 다소 불안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디지털 시대는 산만한 대신 다양하고, 엉뚱한 대신 유쾌하며, 불확실한 대신 새로운 가능성이 있다. 꼴찌가 1등 할 수 있는 시대. 순서 상관없는 세상이 그래도 더 진화된 시대 아닐까?

임문영 인터넷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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