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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속으로] 팔로어 18만 명 75세 SNS 스타…“손자 그리워 그림 편지 써요”

중앙일보 2017.01.14 00:25
BBC서 소개한 브라질 교포 이찬재씨
할아버지는 매일 손자들을 위해 그린 그림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린다. 2015년 말부터 하루에 한 장씩. 무려 450여 장에 달한다.

브라질 상파울루에 사는 교포 이찬재(75)씨는 한국과 미국에 사는 어린 세 명의 손자가 그리울 때면 스케치북을 편다. 그러고는 손자들과 얽힌 추억, 알려주고 싶은 한국의 전통문화, 함께 보고 싶은 자연 풍경 등을 그림으로 남긴다. 이 그림을 사진으로 찍어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에 올리면서 글도 곁들이면 손자들에게 부치는 ‘그림 편지’가 완성된다. 한 손자는 업고, 동시에 다른 손자는 안고 있는 부인 안경자(75)씨의 그림을 그리고 ‘할머니는 슈퍼우먼’이라는 글을 달거나, 수탉을 그린 뒤에 ‘포르투갈에서 행운의 상징’이라고 설명하는 식이다.
 
 
그의 이런 사연은 최근 영국 BBC에 소개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이후 그의 인스타그램(drawings_for_my_grandchildren) 팔로어는 4만여 명에서 18만여 명으로 늘어났다. 이씨의 아들 이지별(46)씨가 아버지의 이야기를 담은 동영상을 제작해 자신의 페이스북(www.facebook.com/writetojilee)에 올렸는데, 480만여 건의 조회 수를 기록했다. 손자 사랑으로 만들어진 할아버지의 SNS는 이제 많은 이가 마음을 나누는 공간이 됐다. 세계 각지에서 수천 건의 댓글이 쏟아졌다. ‘현대의 살아 있는 유산’이라고 감탄하거나, 자신의 부모나 조부모의 SNS 이용 경험을 얘기하기도 한다. 이전까지 e메일이나 메신저도 사용할 줄 몰랐던 할아버지는 일약 ‘SNS 스타’가 됐다.
이찬재씨 그림에 항상 적혀 있는 ‘AAA’는 세 손자의 이름 첫 글자에서 따왔다. 위 줄 왼쪽에서 둘째 사진은 이찬재·안경자 부부와 손자 아스트로, 가장 아래 줄 왼쪽 사진은 손자 아서(왼쪽)와 알란이다. [사진 이지별씨(아들)]

이찬재씨 그림에 항상 적혀 있는 ‘AAA’는 세 손자의 이름 첫 글자에서 따왔다. 위 줄 왼쪽에서 둘째 사진은 이찬재·안경자 부부와 손자 아스트로, 가장 아래 줄 왼쪽 사진은 손자 아서(왼쪽)와 알란이다. [사진 이지별씨(아들)]

지난 3일 이씨와 그의 가족을 전화 인터뷰했다. 그는 부인 안씨와 함께 미국 뉴욕에 사는 아들 지별씨의 집에 며칠간 머무르고 있었다. 이씨는 “손자 아스트로(이아로·2)가 보고 싶어 놀러 왔다”고 말했다. 이씨와 그의 부인 안씨는 1970년대 서울에서 고교 교사로 일했다. 이씨는 지구과학, 안씨는 국어를 담당했다. 이씨 가족은 81년 안씨의 친정 가족을 따라 브라질 상파울루로 이민을 갔다. 당시 지별씨와 딸 이미루(42)씨는 각각 10살, 6살이었다. 지별씨는 미국 뉴욕 파슨스 디자인스쿨에서 그래픽 디자인을 전공한 뒤 구글 등을 거쳐 2011년부터 페이스북 마케팅부서에서 일하고 있다.

이씨 부부는 상파울루에서 30여 년간 옷가게를 운영하다 2011년 은퇴했다. 그 후 이씨의 낙은 맞벌이를 하는 딸 부부를 대신해 손자 아서(최세창·13)와 알란(최세연·12)을 돌보는 일이었다. 하지만 딸의 가족이 2014년 한국으로 이주하면서 이씨는 하루 종일 TV만 보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날이 늘어났다. 그런 아버지를 걱정하던 지별씨는 과거의 추억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아버지가 제자들과 소풍이나 수학여행을 가시면 그곳의 풍경을 그림으로 그리고, 짧은 글을 써 우편으로 보내주시곤 했어요.”

아들은 아버지에게 “이번에는 SNS로 손자들에게 그림 편지를 보내 보라”고 제안했지만 디지털 세상과 거리가 멀었던 이씨는 거절했다. “아버지는 ‘도대체 왜 내 그림을 SNS에 올려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봐야 하느냐’면서 의아해 하셨어요.” 이씨가 마음을 바꾼 건 2015년 4월 친손자 아스트로가 태어나면서다.

뉴욕 아들의 집에서 손자를 안아 본 이씨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아이가 어른이 되면 내가 세상에 없을 텐데, 나를 어떻게 추억해 줄까. 그림을 남겨야겠어.” 이씨는 뉴욕에 머무른 2주 동안 아들에게 SNS 이용법을 배웠다. 순서 하나를 익히면 다른 하나를 까먹는 난관에 부닥쳤지만 인내심을 갖고 수십 번 반복한 끝에 SNS 세상과 만날 수 있었다. 이씨는 “모르는 사람들이 내 그림에 ‘좋아요’를 해줬을 때 신기하고 기뻤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큰 기쁨은 한국의 두 손자가 방과 후 제일 먼저 할아버지의 SNS에서 그림을 보는 것이다. 이씨는 “손자들이 기다리는 걸 생각하면 그림 업로드를 하루도 쉴 수 없다”고 말했다.

처음엔 자신보다 SNS에 먼저 입문한 부인의 도움을 받기도 했지만, 이씨는 이제 사진 편집 기능은 물론 해시태그(#)까지 활용할 수 있게 됐다. 지별씨는 이를 두고 “혁명적인 일”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의 열띤 호응에 힘을 얻은 이씨의 그림 실력도 나날이 늘었다. 물감·먹물·크레용·목탄 등을 두루 활용하고, 마음에 흡족한 그림을 그릴 때까지 몇 시간 동안 자리를 뜨지 않는다.

이씨의 그림 편지는 ‘가족 프로젝트’로 발전했다. 그림과 글의 주제 선정은 부인 안씨가 아이디어를 보탠다. 이씨와 안씨가 한글로 쓴 글은 지별씨가 영어로, 미루씨가 포르투갈어로 번역한다. 이를 위해 네 사람은 한국 시간으로 매일 아침 페이스북 메신저에 접속해 대화를 나눈다. “멀리 떨어져 있지만 우리 가족은 그 어느 때보다 가까워졌죠.”

청년 시절의 활기를 되찾은 이씨는 “SNS를 배운 뒤 내 인생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말했다. 30여 년 전 연락이 끊겼던 옛 친구들이 SNS를 통해 연락을 해왔고, 한국·미국·브라질 등지에서 전시회와 출판 제안이 잇따르고 있다. 이씨 가족은 수천 건의 댓글들을 볼 때 “세계 각지에서 수천 개의 편지를 받는 것과 같은 감동을 느낀다”고 말했다.

“SNS가 아니었다면 제 그림을 많은 사람과 함께 보지 못했을 겁니다. 우리를 가족뿐 아니라 세계인과 연결해 줬어요. ‘이 SNS를 보고 부모나 조부모에게 SNS를 가르쳐드렸다’는 댓글들을 볼 때 기쁩니다. 많은 가족이 새로운 기술을 활용해 삶을 더 아름답게 변화시키면 좋겠습니다.”
 
[S BOX] 고령자 SNS 이용 늘어 60대 10.9%, 70세 이상은 1.5%
정보통신정책연구원의 ‘SNS 이용 현황’을 보면 국내 고령층의 SNS 이용률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60세부터 70세 미만은 2014년 5.1%, 2015년 8.7%, 2016년 10.9%이고, 70세 이상은 2014년 0.4%, 2015년 1.2%, 2016년 1.5%다. 주재욱 정보통신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고령층은 행동 변화가 빠르지 않다는 점을 감안할 때 증가 추세가 뚜렷한 수치”라고 설명했다.

고령층의 SNS 이용률이 증가하는 이유에 대해 전문가들은 스마트폰 등 뉴미디어 기기의 대중화와 젊은 가족 구성원의 영향을 꼽는다. SNS를 활발하게 이용하는 자녀나 손주들에게 SNS 이용법을 배우는 장년층이 늘고 있는 것이다. 장년층과 동떨어져 보이는 SNS는 ‘노인 친화적’인 기술이 될 수 있다. 주재욱 위원은 “고령자들이 좋아하는 ‘가족 교류’에 최적화된 도구”라면서 “가족·친구·이웃들과의 교류를 늘려 이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이지별씨는 “고령자에게 디지털 기술을 가르칠 때는 인내심이 필요하지만 부모나 조부모에게 새로운 세상을 선물하는 기쁨을 맛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임선영 기자 youngc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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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선영 임선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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