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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아침] 편지

중앙일보 2017.01.14 00:01
편지
- 천상병(1930~93)

 점심을 얻어먹고 배부른 내가

 배고팠던 나에게 편지를 쓴다.

 옛날에도 더러 있었던 일,

 그다지 섭섭하진 않겠지?

 때론 호사로운 적도 없지 않았다.

 그걸 잊지 말아주기 바란다.

 내일을 믿다가

 이십 년!

 배부른 내가

 그걸 잊을까 걱정이 되어서

 나는

 자네한테 편지를 쓴다네.



마음 가난함이 어느 경지에 이르면 이런 빛깔을 지니게 될까. 고통과 미움을 넘어 자신에게 투명한 농담을 걸게도 될까. 그러나 배부른 내가 배고팠던 나에게 편지를 쓴다는 설정부터 실은 우스개스럽지만 슬프다. ‘내일을 믿다가 이십 년’이 간 것! 그러니 헛된 기대는 갖지 말라는 것. 잠시 배불러진 내가 그걸 잊고 행여 ‘시건방’을 떨까 봐 배고팠던 본래 나에게 편지를 쓴다는 것이다. ‘나의 직업은 가난’이라고 자부하며, 막걸리 한잔과 허다한 기행으로 자유로웠다고 알려진 사람. 그러나 동백림 사건(67년) 무렵의 기억을 “몇 년이었는가/ 아이론 밑 와이셔츠같이 /당한 그날은”이라고 20년이 지나서야 내비치던 마음의 깊은 곳을 누가 다 알겠는가.

<김사인·시인·동덕여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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