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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예술 - 미술] 달은, 스러져야 차오른다

중앙일보 2017.01.14 00:01
이지은 명지대 교수·미술사학

이지은
명지대 교수·미술사학

내가 아는 부산의 고미술 애호가는 새해를 맞으면 어김없이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을 찾는다. 우리 옛 그림과 달항아리를 눈에 담으며 한 해를 시작하는 그를 보며, 미술사를 업으로 하는 나는 과연 그만큼 미술에 예를 갖춰왔는가 돌아보게 된다. 연이어 드러나는 거짓과 기만의 민낯에 분노하고 참담한 마음으로 힘들었던 지난해다. 마무리는커녕 정리도 안 된 채 맞이하는 새해에는 단단한 각오가 필요하다. 새로워지기 위해 지난날을 돌아보는 의식처럼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 ‘달은, 차고, 이지러진다’를 찾았다.

과천관 개관 30년을 기념하는 전시는 백남준의 ‘다다익선’이 맨 처음 관객을 맞는다. 88년 올림픽 당시, 개천절을 상징하는 1300개의 TV 수상기를 쌓아 만든 이 거대한 탑은, 미디어 시대의 영매를 자처하던 백남준의 바람처럼 당시 세계 곳곳의 모습을 우리 앞에 펼쳐놓았다. 성황당에 천을 묶어 염원을 빌 듯 ‘다다익선’을 에워싼 밧줄은 고인이 된 백남준과 동갑내기인 전위미술가 이승택의 신작이다. 뉴 미디어와 올드 미디어의 만남에 시간은 압축되고, 과거와 현재는 겹쳐진다. 과거를 통과해 온 우리는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을까?

우리의 삶은 미술에 고스란히 각인되었다. 벽면 가득 넘실대는 바다를 비추는 장민승의 영상은 세월호의 망자들을 달래고, KAL기 폭파 사건을 모티브로 한 송상희의 ‘신발들’은 참담한 재난의 기억을 되새긴다. 나란히 선 사람들, 커다랗게 그은 X자, 서용선의 ‘회의’는 문화계 블랙리스트로 어지러운 요즘 구구한 설명 없이도 와 닿는다. 직설적이든 에둘러 표현하든, 미술사에 남는 작품은 당대의 절실한 부분을 건드려왔다.
화가 서용선의 ‘회의’. 예술에 대한 국가의 통제와 검열을 풍자했다. [사진 서용선아카이브]

화가 서용선의 ‘회의’. 예술에 대한 국가의 통제와 검열을 풍자했다. [사진 서용선아카이브]

전시는 그때그때 한국 현대미술이 지나온 여정을 비추며 과거를 소환한다. 80년대 말 미술계는 모더니즘과 민중미술, 포스트모더니즘의 논쟁으로 들끓었다. 모더니즘 옹호자들은 예술의 순수성을 주장하며 민중미술이 정치적 이념에 물들어 대중을 선동한다고 질책했고, 민중미술 진영은 모더니즘이 현실을 외면하고 추상의 세계에 안주한다고 비난했다. 회화나 조각 같은 기존 장르를 탈피하는 매체 실험과 대중문화의 차용, 페미니즘 등 다양한 시각을 주장한 포스트모더니즘은 서구의 유행을 좇는 설익은 절충주의로 의심받았다.

30년 후, 보라. 이들이 한 전시에 모였다. 한국적 모더니즘을 추구하던 단색화는 독창적 미감으로 국제 미술계의 주목을 받고, 현실을 직언하던 민중미술은 현대사를 헤쳐 온 우리 삶을 생생하게 전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일탈과 도발은 고정관념을 무너뜨리고 미술의 영토를 넓혔다. 어느 하나 버릴 것 없는 알찬 다양성이 우리 미술을 풍성하게 했다.

예술에는 모범답안이 없다. 새로운 질문과 서로 다른 답이 있을 뿐이다. 빛나는 과거라도 마냥 되풀이된다면 새날은 오지 않는다. 이것이 달이 완전히 이지러지고 나서야 다시 차오르는 이유다.
 
◆약력
서울대 서양화과 졸업. 미국 보스턴대 미술사학 박사. 한국미술이론학회 회장.

이지은 명지대 교수·미술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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