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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인의 작가전] 인 더 룸 #8

중앙일보 2017.01.14 00:01
"꼴리지?"
 
"별로."
 
"엄창?"
 
"그런 소리 좀 하지 마, 벌 받아. 재미도 없어."

 
방과 후엔, 주로 학교 뒷산에서 영식이와 어두워질 때까지 시간을 때웠다. 집에 일찍 가봐야 잠들기 전까지 엄마나 주인집 영감 부부의 잔심부름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영식이는 가방에 숨겨온 성인 잡지를 꺼내어 펼쳤다. 벌거벗은 여자가 해괴한 포즈를 취한 사진이었다. 대단한 것을 보여준다더니. 주인집 영감의 서재를 청소하며 그보다 더한 사진도 많이 보았다. 처음 봤을 때는 야릇한 기분에 사로잡혔지만, 요즘에는 들춰보지 않게 되었다. 벌거벗은 여자의 사진을 볼 때마다 이모의 괴성이 들렸기 때문이다.
 
영식이는 학교에서 나올 때부터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여자아이들의 얼굴, 몸매, 성격을 평가했다. 소매 사이로 삐쳐 나온 겨드랑이의 털을 봤다느니, 생리대를 누가 누구에게 빌려줬다느니, 달리기할 때 누구의 가슴이 제일 출렁거리는지. 같이 있다 보면 도대체 영식이의 하루 중에 여자를 빼면 남는 게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영식이는 나를 쳐다보며 여자 가슴 모양을 흉내 내는 몸짓을 취했다.
 
"이거는 누가 제일 큰가?"
 
"모르지, 그걸 어떻게 알아."
 
"황연화?"
 
"뭐? 하지 마."
 
"범구 너 연화 좋아하냐?"
 
"아무튼 하지 마. 또 하면 죽여 버린다." 


연화는 또래보다 성숙이 빨랐다. 교복 대신 사복으로 갈아입으면 성인으로 보였고, 졸업생 무리에 섞여서 시내 술집에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수업시간 중에 자주 책상에 엎드려서 잤지만, 이번 기말고사 일등도 연화였다. 미술 과제로도 몇 번 상을 받았고, 육상대회에서는 반대표를 했다. 연화는 으레, 누구보다 쉽게 얻었다. 그리고 나는 늘 멀찌감치 연화를 지켜보았다.
 
어렸을 적 함께 자랐다. 소꿉놀이할 때 부부 흉내를 냈고, 나중에 결혼하자는 이야기도 했었던 것 같다. 연화는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햇살이 좋게 기억되던, 모래 장난을 하며 종일 조잘거리던 때를.
 
연화와의 거리가 점점 멀어지기 시작한 것은 연화가 주인집의 손녀딸이고, 나는 일하는 아줌마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였다. 이모와의 일이 있고 난 뒤에는 아예 연화와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반은 죄책감, 반은 연화에 대한 음탕한 생각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사건.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는 무더운 여름의 조회시간.
 
그날은 여름이었고 땡볕이 집단 최면이라도 거는 듯했다. 교장 선생님의 훈화는 늘어진 테이프 같았다. 뒤돌아서 이야기를 나누는 아이들도 한둘씩 보였다. 그때 앞에서 큰 돌이 땅에 떨어지는 듯 퍽 소리가 났고 아이들 모두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고개를 숙이고 운동장 흙을 운동화로 툭툭 쳐내고 있을 때라 늦게서야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아이들이 개미 떼처럼 한 곳으로 몰려들었다. 아이들 틈으로 쓰러진 연화의 얼굴이 보였다. 둘러싼 아이들을 밀치고 달려가니 바닥에 떨어진 목련처럼 창백해진 연화가 눈을 감고 있었다. 
 
선생님들이 하나둘 달려오고 있는 게 보였다. 교복 치마가 뒤집어져 속옷이 보였고, 전교생이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머리가 하얘졌다. 최근 들어 연화가 좀 야윈 듯 느껴졌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망설이다가 선생님을 밀쳐내고 연화를 업었다. 행선지를 정하지도 못한 채 무조건 내달렸다. 의사를 부른다면 병원보다 집이 나을 것 같았다. 의식이 없는 연화의 몸은 물이 흠뻑 젖은 솜이불 같았다. 점점 팔의 힘이 풀렸고, 여름 하복은 땀으로 젖기 시작했다. 손에서도 땀이 났지만, 허벅지를 꽉 잡고 연화를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십 분이면 도착할 집이 배 이상은 걸린 듯했다.
 
땀범벅이 된 채 집에 도착했고 몸을 틀어 연화를 눕혔다. 연화 엄마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의사와 함께 나타났다. 의사는 연화에게 피로가 누적된 것 같다고 이야기했고, 연화 엄마는 기말고사 기간 내내 밤새워 공부하느라 잠을 자지 못한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다음 날, 학교에 들어섰을 때 교문에서부터 남다른 기류를 느꼈다.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말없이 계단을 오르다 보니 영식이가 실실 웃으면서 내려오고 있었다.
 
"전교생이 다 보는데. 깡 좋아, 크크. 네가 연화 업고 달려가는 거 보고 애들이 별 얘길 다 하드라."
 
연화의 허벅지를 꽉 잡은 내 손은 아이들이 조롱거리가 돼버린 모양이었다. 갑자기 잠에서 깬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사람의 상상력이란 항상 실제보다 형체가 컸다. 갑자기 이모의 괴성이 귓속에서 다시 들리는 듯했고 구역질이 쏠렸다.
 
사흘이 지났다. 콧대 높던 연화는 전교생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하굣길에, 나를 기다리고 있던 무리와 마주쳤다. 아이들의 표정으로 봐서는 좋지 않은 상황이 분명했고, 그 가운데 인상 쓰고 있는 연화가 보였다. 그중에 덩치가 큰 놈 하나가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나를 불렀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도망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너, 나랑 사귀어?“
 
"뭐? 무슨 말이야?"
 

갑자기 연화는 매서운 손바닥으로 내 얼굴을 내리쳤다. 당혹스러웠다. 화가 확 치밀었지만, 꾹 참았다.
 
"내가 너한테 업어 달랬어?“
 
"그건 네가 갑자기 쓰러져서...“
 
"드러운 손으로 내 몸을 만져?“
 
"미안해 정말 그런 거 아니야. 급해서...“
 
"아줌마랑 같이 쫓겨나 볼래?"

 
순간 돌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했고 심장이 부글거렸다. 몇몇 아이들은 어머니가 연화네 집안일을 봐주고 있는 것을 아는 것 같았지만 직접 학교에 이야기가 센 적은 없다. 약점을 잡아 쏘아붙이는 연화의 얼굴을 주먹으로 한 대 갈기고 싶어졌다. 
 
"빤쓰 내놓고 자빠져있는 거 데려다줬더니..."
 
연화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애비 없는 종년 자식새끼가...“
 
"...뭐라고?“
 
"종년 자식새끼라고 했다, 왜.“
 
"야 이 씨발년아!"
 

갑자기 주먹이 여기저기 사정없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한참을 얻어맞고 바닥에 힘없이 쓰러져 있었다. 맞는 것은 그다지 아프게 느껴지지 않았다. 때리고 지쳐서 가던 놈들 사이로 연화의 얼굴을 보았다. 입을 앙다문 채 이쪽을 노려보고 있다. 연화는 조금도 화가 풀리지 않은 것 같았다. 수치심이 생겨 그렇게 했다고, 연화를 이해해보려고 노력했다.
그날 밤, 마당 안으로 깊게 바람이 몰려들었고 마당에 서 있던 나무들이 오한을 느끼듯 바람에 부들거렸다. 어머니는 오늘도 노크 소리를 듣고 방을 나섰다. 잠시 후 바깥에서 주인집 할머니의 고함이 들려 벌떡 일어났다.
 
"이 미친년! 네년이 내 서방을 꼬여냈어? 집안 망신을 시켜도 유분수지, 서재에서 밤마다 그러고 놀았단 거지?"
 
부엌에서 물 잔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모는 덜덜 떨며 서재 쪽으로 걸어 나와 괴성을 내지기 시작했다. 그때 집사 아저씨 방에도 불이 켜지고 집 구석구석은 입이 달린 듯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이 서재 쪽으로 달려갔다. 연화 짓이다. 확실하다. 며칠 동안 계속 드나들며 눈치를 살피더니, 이것 때문이었나. 주인집 할아버지가 밤마다 어머니를 불러내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고, 그것을 주인집 할머니에게 말할 사람도 없었다. 연화다.
 
"저, 애기 가졌어요."

 
순간 정적이 흘렀고 주인 할머니는 털썩 주저앉았다.
 
"지금... 수작 부리는 거지?"
 
침묵을 깨고 엄마는 말을 이어갔다.
 
"애기 가졌어요. 낳을 거고요."
 
주인 할아버지는 뒷짐을 지고 서재를 빠져나와 자기 방으로 사라졌고 서재 바닥에 딸린 이불 위에 엄마 혼자 앉아있었다.
주인 할머니는 앉아있는 엄마의 배를 걷어차려고 했고 엄마는 뺏길 수 없는 물건에 집착하듯 배를 끌어안았다.
엄마는 분해 보였지만 침착하게 이야기를 했다.
 
"...영감님이 아들 낳으면 아이와 우리 범구 호적에 올려주신다고 했어요."
 
주인 할머니는 한참 말을 잃은 듯 멍하니 엄마의 배를 바라보았다.
 
"호적에 올려? 호적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집사에게) 한의원 가서 애 떼는 약 받아와요."
 
어머니는 할머니를 노려보며,
 
"사모님이 영감님한테 시큰둥하니까 정붙일 곳이 없었던 거 아니에요?"
 
"아무리 오입이 좋아도... 아무리 오입이 좋아도...  어디 이런 근본 없는 똥갈보 년한테!"

 
갈보. 나는 그 말의 뜻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할머니, 울 엄마한테 지금 뭐라고 했어요? 할아버지가 계속 불러낸 거지, 우리 엄마가 좋아서 나간 줄 알아?"
 
"....뭐라고?"
 
"집사!!!! 집사!!! 저 새끼 잡아! 당장!"

 
집사 아저씨에게 뒷덜미가 잡혀 질질 끌려갔다. 버둥버둥하며 빠져나오려고 애썼지만 팔만 허공에서 종이 인형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어디다 눈깔을 부라리고..."
 
"나 살아있는 동안엔 그 애 못 낳는다. 꿈 깨라."
 
"낳을 거예요. 우리 범구는 개차반처럼 키웠어도 얘는 잘 가르치고 잘 먹일 거예요."
 
"뭐라고? 못 지워? 네가 애를 못 지워? 내가 미쳤지. 근본도 없는 갈보 년한테 살림을 맡겼어! 그래 이년아! 어디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두고 보자! 집사! 그 새끼 손모가지 잘라!"
 
"저는 눈 하나 깜짝 안 해요. 그래도 그렇게까지는 하지 마셔요."
 
"얼른 잘라! 못하겠어? 내가 해?" 

 
집사 아저씨가 가만히 서 있자 주인 할머니가 소리를 질렀다.
 
"필요 없어. 너도 나가! 네 마누라 데리고 어서 당장 이 집에서 나가!"
 
집사 아저씨는 못 이기는 척 다가왔지만 내가 발버둥 치자 팔을 우악스럽게 잡았다.
 
"아무리 그래도 절대 아이는 못 지워요. 그만두세요! 영감님! 영감님!"
 
할아버지는 문 바깥으로 나오지 않았고 나는 두려워 몸을 벌벌 떨었다. 팔을 빼려고 발버둥 쳤지만, 철근에 고정된 듯 꿈쩍하지 않았다. 
집사 아저씨는 도끼를 하늘로 쳐들었고 잠시 멈췄을 때 바지가 뜨겁게 젖었다. 덜덜 떨다가 오줌을 지려버렸다.
 
도끼가 내려오는 순간 어머니는,
 
"지워요! 지울게요! 마님!" 
 
어머니는 설마 했다. 가족으로 받아줄 거라 믿었다. 노망든 영감의 거짓과 뱃속 아이를 믿고 시궁창이 맑은 호수 위라도 되듯 모험을 했다. 어머니는 태도를 바꿔 애걸했다. 어머니의 고함을 듣고 집사는 도끼를 틀었지만 도끼날은 고함보다 빨리 떨어졌고 유난히 길었던 가운뎃손가락 한 마디, 그리고 검지 끝 살점이 붉은 피를 터트리며 내 몸에서 떨어졌다.
 
왜, 나는 집사 아저씨가 내 편을 들거나 나를 해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을까.
 
계집애가 낼만 한 고음이 목구멍에서 빠져나왔다. 그것은 내가 지르는 소리가 아니었다. 잘린 손을 오줌 지린 바짓가랑이 사이로 가져와 부여잡았다.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작가 소개  
조금 어린 나이의 결혼 그리고 빠른 나이의 이혼, 통신회사, 콜센터, 어학원 운영 중 경영악화로 빈털터리가 됨. 2년간 낙오자라는 패배감으로 자폐적인 시간을 보내던 중 무작정 세계 여행을 시작. 1년 정도 해외 여행 중 글을 써야겠다고 결심. 성을 사회적, 문화적으로 조망하는 시와 수필을 SNS에 연재 중이다.
 
<아스팔트에 핀 꽃> 동인 시집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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