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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名文열전② 최병우 / 불후의 名 르포… 판문점 휴전협상 관전기 “기이한 전투의 정지"

J플러스 2015.08.25 10:30
좋은 글을 쓰려면 잘 쓰여진 과거의 글들을 읽어보는 것이 우선이다.
디지털 시대 글쓰기의 시작도 아날로그 시절의 명문(名文)들을 다시금 감상해보는데서 출발한다. 해방 이후 한국 현대 언론사의 한 때를 풍미했던 걸출한 문객들이 써내려갔던 명문들을 소개한다.



언론名文열전② 최병우
불후의 名 르포… 판문점 휴전협상 관전기 “기이한 전투의 정지”

 

 최병우(崔秉宇·1924~1958)는 한국 언론사상 종군 취재현장에서 목숨을 바친 최초의 언론인이다. 1958년 9월 11일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 정부 간에 대만해협을 사이에 두고 포격전이 벌어지자 한국 언론 특파원 자격으로 대만의 최전방 지역인 금문도(金門島) 현장 취재에 나섰다가 타고 갔던 배가 침몰하면서 현장에서 순직했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34세였다.
 관훈클럽은 1990년 이를 기리기 위한 ‘최병우 기념 국제보도상’을 제정해 매년 그의 정신을 잇는 언론인을 선정, 시상하고 있다.  
 목포 출신인 그는 제일고보(경기중)에 이어 일본 도호쿠(東北)제국대학을 다니던 중 일본군에 징용됐다가 2달여 만에 일본이 패망하면서 각고 끝에 고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뛰어난 외국어 실력으로 미 군정청 외무처, 주일 대표부 등에서 일했던 그는 한국은행 동경지점의 개설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한국은행 조사부장으로 이를 눈여겨봤던 장기영이 경영난에 빠졌던 조선일보의 사장이 되면서 그를 외신부장으로 기용한 것이 그가 언론계에 뛰어들게 된 동기다.
 유창한 영어를 구사했던 최병우는 6·25 전쟁 당시 종군기자로 판문점을 출입하면서 2백여 명의 외국 특파원들 사이에서 한국 기자로는 드물게 많은 활약을 펼쳐 이름을 떨쳤다.
 1954년 장기영이 한국일보를 창간하자 그를 따라 한국일보 외신부장으로 자리를 옮긴 그는 이후 한국일보 논설위원 겸 코리아타임스 편집국장을 지내면서 1957년 1월 중견 언론인들의 모임인 ‘관훈클럽’의 창립에 적극 참여했다.  같은 해 4월 7일 독립신문 창간일에 맞춰 한국신문편집인협회를 설립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이 날을 ‘신문의 날’로 정하는데 공헌했다.  
 평소 최병우는 “한국전쟁 당시 외국인 기자 17명이 생명을 바쳤지만 한국인은 단 한사람의 기자도 다치지 않았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며 현장취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중국·대만 간 분쟁이 터지자 편집국장임에도 현장 취재를 자임해 현지로 달려간 것도 그의 이런 소신 때문이었다
 

 <중국 대륙에서 5 마일 밖에 떨어지지 않은 최전방지역인 금문도로 건너가기 위해 대만 상륙정에 올라탄 최병우(화살표)의 마지막 모습. 이 사진 촬영 직후 그는 실종됐다.>

최병우는 신문이 독자를 가르치기에 앞서 독자의 눈높이에 먼저 맞출 것을 주장했다. 항상 “독자의 지식을 과소평가 말고, 독자의 정보를 과대평가 말라”고후배들에게 신신당부했다. 독자의 지식은 높지만 독자의 정보는 적으니 그런 점을 고려해 정확하고 친절한 기사를 쓰라는 뜻이다. 
 "공부하는 기자가 돼야한다”는 말도 입버릇처럼 되뇌이며 늘 강조했다고 지인들은 회상했다. 항상 해외 원서를  곁에 두고 읽으며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 미약한 조국의 운명을 고민했던 그는 고뇌하는 학구파 지식인으로서의 언론인의 삶을 살아간 대표적인 인물로 기억될 만하다.
 수려한 미문으로 정평이 나있던 그의 기사 역시 60여 년 전의 글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현대적 수준의 뛰어난 문장력을 보여주고 있다. 
  1953년 7월27일 6.25 전쟁의 휴전협정이 체결된 직후 조선일보 1면 머리기사로 게재됐던 그의 판문점 휴전협정 조인식 참관 스케치 기사는 한국 언론 르포 기사의 백미라 불릴 정도로 간결한 문장, 정교한 묘사와 감성적인 필력이 돋보이는 수작이다.

  최근 한반도를 요동치게 만들었던 사흘간의 판문점 남북고위협상을 놓고 수많은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과연 최병우가 이 협상장을 직접 지켜봤더라면 어떤 글을 써내려갔을지 궁금해진다. 
 

<1953년 7월 27일 유엔군 측 수석대표 해리슨(왼쪽)과 공산군 측 수석대표 남일(오른쪽)이 판문점에서 정전협정 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사진=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기이한 전투의 정지>

  백주몽(白晝夢)과 같은 11분간의 휴전협정 조인식은 모든 것이 상징적이었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비극적이며 상징적이었다. 학교 강당보다도 넓은 조인식장에 할당된 한국인 기자석은 둘뿐이었다. 유엔 측 기자단만 해도 약 100명이 되고, 참전하지 않은 일본인 기자석도 10명이 넘는데, 휴전회담에 한국을 공적으로 대표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볼 수 없었다. 이리하여 한국의 운명은 또 한 번 한국인의 참여 없이 결정되는 것이다.
  27일 상오 10시 정각, 동편 입구로부터 유엔 측 수석대표 해리슨 장군 이하 대표 4명이 입장하고, 그와 거의 동시에 서편 입구로부터 공산 측 수석대표 남일(南日) 이하가 들어와 착석하였다. 악수도 없고 목례도 없었다. ‘기이한 전쟁’의 종막다운 기이한 장면이었다.
북쪽을 향하여 나란히 배치된 2개의 탁자 위에 놓인 각 18통의 협정문서에 교전 쌍방의 대표는 무표정으로 사무적인 서명을 계속할 뿐이었다. 당구대같이 퍼런 융에 덮인 2개의 탁자 위에는 유엔기와 인공기가 둥그런 유기 기반에 꽂혀 있었다. 이 2개의 기 너머로 휴전회담 대표는 2년 이상을 두고 총계 1000시간에 가까운 격렬한 논쟁을 거듭하여 온 것이다.
한국어·영어·중국어 세 가지 말로 된 협정문서 정본 9통, 부본 9통에 각각 서명을 마치면 쌍방의 선임 참모장교가 그것을 상대편으로 준다. 그러면 상대편 대표가 서명한 밑에 이쪽 이름을 서명한다.
정(丁)자형으로 된 220평의 조인식 건물 동익(東翼)에는 참전 유엔 13개국 군사 대표들이 정장으로 일렬로 착석하고 있으며 그 뒤에 참모장교와 기자들이 앉아 있다. 서익(西翼)에는 북쪽에 괴뢰군 장교들, 남쪽에 제복에 몸을 싼 중공군 장교의 일단이 정연하게 착석하고 있다.
양편의 수석대표는 북면하여 조인하고, 멀리 떨어져 좌우에 착석한 양측 장교단은 동서로 대면하고 조인하는 것을 주목하고 있다. 조인이 계속되는 동안 유엔 전폭기가 바로 근처 공산군 진지에 쏟고 있는 폭탄의 작렬음이 긴장된 식장의 공기를 흔들었다. 원수끼리의 증오에 찬 정략 결혼식은 서로 동석하고 있는 것조차 불쾌한 듯이, 또 빨리 이 억지로 강요된 의무를 끝마치고 싶다는 듯이 산문적으로 진행한다.
해리슨 장군과 남일은 쉴 새 없이 펜을 움직인다. 각기 36번 자기 이름을 서명하여야 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의식에 따르는 어떠한 극적 요소도 없고 강화에서 예기할 수 있는 화해의 정신도 엿볼 수 없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정전’이지 ‘평화’가 아니라는 설명을 잘 알 수 있었다.
각기 자기 측 취미에 맞추어 가죽으로 장정하고 금(金)자로 표제를 박은 협정부도(協定附圖) 각 3권이 퍽 크게 보인다. 그 속에는 우리가 그리지 않은 분할선이 울긋불긋 우리의 강토에 종횡으로 그려져 있을 것이다.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이곳이 우리나라인가’ 이렇게 의아(疑訝)해한다. 그러나 역시 우리가 살고 죽어야 할 땅은 이곳밖에 없다고 순간적으로 자답하였다.
  10시 12분 정각, 조인작업은 필하였다. 해리슨 장군과 남일은 최후의 서명을 마치자 마치 최후통첩을 내던지고 퇴장하듯이 대표를 데리고 나가버린다. 남일은 훈장을 가슴에 대여섯 개 차고 있는 데 반하여 해리슨 장군은 앞 젖힌 여름 군복의 경쾌한 차림이라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관례적인 합동 기념촬영도 없이 참가자들은 해산하였다. [판문점 조인식장에서=최병우 특파원 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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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병기 홍병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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